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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된 우연'을 찾은 사람, 홍현

그는 일 잘하는 사람이었다. 입사와 함께 엄청난 성과를 올렸다. 신입 사원인 그가 A 평가를 받는 바람에 담당 과장이 그 해 진급에서 누락될 정도였다. 그의 주요 업무는 홍보 업무로 시작해, 조직 문화와인사 쪽으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3년 정도가 지나자 주변 회사들로부터 스카웃 제의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직을 마음 먹었다. 면접을 하던 도중 담당 이사가 손을 내밀었다. 사원에서 대리로 입사하는 조건이었다. 연봉은 천 만원이 올랐다. 미국 대학원 교육과 파트장을 약속받았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거기까지였다. 입사 한 달 만에 그의 면접을 담당한 이사가 성희롱으로 퇴사하는 일이 있었다. 주목받았던 입사 만큼이나 냉랭하고 시기어린 대우가 이어졌다. 직급과 연봉 외의 모든 혜택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누가 해도 안될 것 같은 일들만 주어졌다. 그제서야 그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어떤 성공도 혼자의 힘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내가 잘해서 그런 인정을 받은 것만은 아니었구나 싶었어요. 회사나 리더의 인정이 있었고, 잘 될만한 일이 주어졌기 때문이지, 결코 내가 잘나서 그런 성공이 따른 것은 아니란 것을 깨달은 거죠. 그때 겸손이란 것을 배웠습니다."


1년 만에 그 회사를 나왔다. 낮은 자존감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세 번째 회사는 즐겁게 다닐 수 있었다. 죽지 못해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저렇게 다녀서는 어떤 성과도 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진급이 계속되면서 선택으로 여겨졌던 일들이 필수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주말 출근이 당연해졌다. 그가 생각하는 성공은 재정적인 여유와 시간적인 여유가 함께 가는 것이었다. 조용히 퇴사를 준비했다. 5년 가까이 강의 콘텐츠를 개발하고 자신만의 강의 루트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강의가 밀려 있다는 거짓말로 아내를 설득했다. 그러나 그렇게 치밀한 준비의 결과는 허탈했다. 첫 달 매출이 47만 원이었다. 심지어 오랜 준비로 만들어낸 매출은 수입의 5%에 불과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렵사리 강의를 이어가며 '행정사'를 준비했다. 안정된 삶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 장치를 만들어 두기 위해서였다.


"아버지가 엘지전자에 다니셨어요. 형은 변호사, 나는 대기업 과장, 이 두 가지가 어머니의 유일한 자랑거리셨죠. 퇴사를 결심했을 때 어머니가 눈물로 말리셨어요. 한 동안은 둘 째 아들이 직장을 그만 둔 사실을 주위에 알리지도 않으셨죠."



법원과 검찰청과 관련된 일은 법무사가 맡는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일은 행정사가 담당한다. 사법 기관의 대리인이 변호사라면 행정기관의 대리인은 행정사인 셈이다. 기업의 각종 인허가는 물론 건축 허가, 음주운전으로 인해 억울한 행정처분에서 구제하는 일도 돕는다. 아주 작게는 미성년자인 줄 모르고 술을 팔다가 걸린 편의점 주인을 돕는 일도 맡는다. 외국인과 결혼했을 경우 비자를 받아주는 일을 도울 때도 있다. 다행히 새롭게 시작한 그의 업무는 회사 다닐 때와 비교해 '스무 배' 이상의 만족도를 가져다주었다. 사실 행정사 일만큼 편차가 큰 일도 없다. 수입이 100만원이 채 되지 않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누군가를 '돕는' 삶을 살기 원했던 그에게 이 일은 돈을 버는 것 이상의 보람을 안겨 주었다.


"한 번은 유엔 유니버시티에 지원해서 합격한 적이 있었어요. 그곳을 나오면 절반 정도가 유엔에 들어간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두 개 이상의 유엔공용어를 해야 한다는 조건이 발목을 잡았어요. 그 외에는 정부 기관이나 NGO에 가야 해서 고민하고 있는데 우연히 NGO에서 일하는 분을 만났어요. 그 분이 그러시더군요. 이런 단체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돈'이라구요."


그 경험이 그의 삶을 행정사의 길로 이끌었다. 10년 이상 컴패션, 엠네스티 등의 NGO에 후원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도 누군가를 '돕는' 삶의 또 다른 길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타인을 향한 배려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남의 집 프로젝트'를 통해 다양한 퇴사자들을 만났다. 자신의 집으로 사람을 초대해 보이차를 마시며 다양한 고민을 들어주고 미래의 계획을 나눈다. 그러면서 그가 새롭게 알게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건 회사 안에서는 결코 회사 밖의 새로운 기회들을 볼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저는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일단 나오라고 말해요. 제 눈에는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너무도 많이 보이거든요. 사실 대기업 다닐 때도 매달 2,30만 원씩 적자가 나고 있었어요. 해마다 연봉이 올라봐야 얼마나 오를 수 있겠어요. 어차피 마이너스의 삶이라면 밖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는게 낫다고 생각해요. 물론 회사 다니는 일이 즐거운 사람은 그냥 다니는게 베스트에요. 하지만 삶 자체를 바꾸고 싶다면 자기 사업을 하는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회사 안에서 머물러 있어선 안되죠. 능력이 있다고 대표가 될 수 있는 것 아니니까요."


메모를 위한 인터뷰는 여기까지였다. 나는 노트북을 닫고 본격적으로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내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가 쓰고 싶다는 책에 관한 이야기, 행정사로서 차별화고 싶다는 브랜딩에 대한 대화에서부터, 퇴사자를 위한 강의 프로그램과 콘텐츠 기획까지 다양한 대화들이 오고 갔다. 많은 이들이 회사가 주는 안정성을 담보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곤 한다. 하지만 안정이라는 열매를 꽉 쥔 상태에서는 항아리에서 그 손을 뺄 수가 없다. 항아리를 부숴야만 새로운 기회와 자유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를 나오고 났을 때에서야 새로운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회사 안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던 기회들이었다. 오늘 그를 만난 것처럼 전혀 엉뚱한 사람과 기회를 통해 새로운 일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었다.



"내가 만난 신입 사원들이 열정은 있는데 꿈이 없다고 많이들 얘기해요. 하지만 꿈은 절대로 내가 찾는게 아니네요. 꿈이 나를 찾는 거에요. 꿈이 나를 찾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뭔가를 해야 하죠. 자꾸 나서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야만 해요. 그건 회사 안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들인 거죠."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스몰 스텝'으로 이어졌다. 친구의 소개로 찾아왔던 그의 명함을 들고 '행정사가 왜...'라는 질문을 던졌던 기억이 새삼 새로웠다. 그가 스몰 스텝을 통해 찾고 있었던 것 역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만남이 주는 에너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일이 확장 일로에 있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 같았다. 주어진 일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아다니는 삶, 그것은 곧 수익으로도 연결되고 있었다. 행정사는 일을 만들어 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수입의 차이로 이어진다. 백 만원을 버는 행정사와 수천 만원을 버는 행정사를 만드는 결정적 차이는 아마 꿈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자와 그 꿈을 찾아다니는 사람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마지막으로 그가 쓰고 싶다는 책의 주제를 슬쩍 물어보았다. 좋은 글은, 팔리는 책은 결국 자신만의 콘텐츠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국가와 싸워 이기는 법'이 첫번 째 이야기에요. 두 번째가 '로스쿨은 나왔지만 변호사는 아닙니다', 세 번째는 '퇴사자와 스타트업을 위한 창업 프로그램'으로 책을 써보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언젠가는 '내 속도대로 사는 법'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네요. 이 책들이 과연 가능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시간 동안의 짧은 이야기로 이렇게 혹해본 적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장 그에게 퇴사자를 위한 강연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어보자고 제안해 두었다. 그에게만 보인다는, 돈을 벌 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을 다른 이들에게도 함께 나누고 싶었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에는 나도 있을 것이다. 월요일 오전의 아침 햇살이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들 사이로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뭔가 하루의 일을 다한 기분으로 그와함께 스타벅스 매장을 걸어나왔다. 아주 기분 좋은 한 주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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