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 당시만 해도 아주 잘 나가던 조그만 기독교 관련 잡지사의 편집장을 교회 화장실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마치 연예인을 보는 듯한 경외심으로 말도 못 붙이고 그 자리를 나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이후 그분과 함께 일했던 사람을 회사에서 만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그분에 관한 숨은 이야기 몇몇을 알게 되었다. 좋은 얘기였으면 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그 잡지사의 소유권과 관련한 내부 분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편집장은 회사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건 내꺼야!"
유독 이 외침이 크게 들렸던 건 아마 일반 회사가 아니라 기독교 잡지사였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잡지에 뻬곡했던 글들이 주는 메시지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으리라. 사람의 욕심이 가진 민낯을 본 건 그 이후로도 여러 번 있었다. 오랫동안 몸 담았던 브랜드 전문지에서는 에디터의 이름(byline이라고 한다)을 글에 싣지 못하도록 했다. 그럴 경우 에디터들이 자신의 글에만 집중한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호평을 받았던 그 글이 어떤 에디터의 글이었는지 사람들은 지금도 알지 못한다. 오직 편집장의 이름만 선명히 기억될 뿐이다.
얼마 전 이안이라는 미국인이 여자 친구와 함께 스몰 스텝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벌써 두 번째다. 짧은 영어로 1시간 이상 대화를 이어가자니 난감했던 기억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그런 그가 12월에 있을 송년회 때도 참석할 거라고 한다. 스몰 스텝이 궁금해서 내게 물어보고 싶다고 한다. 다시 한 줄의 식은 땀. 그런데 그의 눈에 비친 모임의 모습은 컬트(cult)스러웠다고 한다. 마치 어떤 종교의 모임 같은 이미지로 비친 모양이었다. 그 중심에 내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아,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겠구나... 묘한 책임감과 반성의 감정이 교차했다. 다. 내 의도과 상관없이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는 자각을 한 것이다.
스몰 스텝이란 모임을 한 지 1년을 넘어간다. 스무 개 가까운 단톡방들이 저마다의 색깔을 가지며 조금씩 성장해가고 있다. 사진방에서는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고, 낭독방에서는 연극을, 글쓰기방에서는 60일 간의 시즌4를 마치고 쫑파티를 준비중인 요즘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이 모든 모임의 주인인양 행세를 하고 다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마치 내가 이룬 성과처럼, 그들의 바이라인을 지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 모든 멋진 모임의 중심에 내가 있다고,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어쩌면 그런 생각이 이 모임의 건강한 성장에 해를 끼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모임 시작 때만 해도 운영진의 모임 개설에 대한 기준은 몹시도 엄격했다. 동일한 주제의 방은 개설을 금지하고 메인 방에서는 일체의 외부 광고를 금지했다. 덕분에 모임 '청정'하다는 평까지 들을 정도였다. 하지만 500명 정도의 규모를 한계로 더 이상 성장하지 않았다. 나는 그제서야 그것이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운영진의 결정이건 무슨 이유건 간에, 나는 이 작은 모임의 맹주처럼 성장의 열매를 혼자 독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과연 이 스스로의 한계를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
이제는 어떤 식으로든 각각의 방을 스몰 스텝이란 이름에서 자유롭게 하려고 한다. 나만 열매를 독차지할 수 없다. 16개에 달하는 모든 방이 스몰 스텝처럼 성장하기 원한다. 그 방의 방장들이 나처럼 또 하나의 브랜드를 만들 수 있기 바란다. 어쩌면 그 방들 중에는 스몰 스텝 보다 더 커지는 방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떤가. 그 모임들이 스몰 스텝이란 그늘 아래 머물러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원래의 목적은 이 모임이 커지길 바란 것이 아니었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이 각각의 자기다움을 발견하고 성장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원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스몰 스텝'이라는 모임의 이름을 허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부처를 만나려면 부처를 죽이고 가라고 했다. 그 말이 어쩌면 이런 뜻은 아니었을지. 이제 기쁘게 그들을 풀어줄 때가 되었다. 적어도 내 마음 속에서만큼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