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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 열흘 붉었던 시절의 카페 골목을 걷다

닐니리 만보 #01. 정자동 카페 골목

참 희한한 일이다. 부산에서 오래도록 살면서도 자갈치 시장을 가보지 않았다. 오래된 부산 극장에서 건널목 하나를 건너면 되는데 갈 일이 없었다. 친구 따라 분당으로 올라온지 19년 차, 마치 자갈치 시장처럼 잘 가지 않았던 카페 골목을 닐니리 만보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처음으로 제대로 걸었다. 재밌는 사실은 내가 알고 있던 그 골목이 카페 골목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지도에도 선명하게 나와 있는 이 골목이 그 골목인 줄 미처 몰랐다. 한때 청담동이나 신사동 카페 골목의 대를 잇는 곳으로 유명했던 이곳은 이제 아주 쓸쓸한 골목이 되었다. 지하철 신분당선이 뚫린 이후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이야기가 빈말이 아니는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하철로 17분 거리에 강남역이 위치하니 이곳의 역할이 모호해졌다. 화무십일홍, 열흘 붉었던 꽃처럼 시들어가는 이 골목길을 설연휴에 찾으니 감회가 새롭다. 이 골목이 그렇게 북적이던 호시절을 지나는 동안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종종 들르는 라멘집에서부터 골목 투어를 시작했다. 카페 골목은 아니지만 그래봐야 5분 거리다. 코이 라멘은 네이버에서 일하는 옛 직장 동료의 추천으로 알게 되었다. 근처를 찾은 손님을 만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집이다. 몇 평 되지 않는 좁은 라멘집에서 마늘을 듬뿍 넣은 이 집의 라멘을 우리집 아이들도 좋아했었다. 100% 토종 한국 브랜드임을 알리는 입간판이 요즘 이들의 마음 고생을 웅변하는 듯 하다. 그런데 그 옆으로 수요 미식회 출연을 알리는 '고쿠텐'이라는 일어 간판이 보인다. 일본식 덮밥을 파는 모양인데 간촐한 메뉴가 신뢰를 더한다. 흰 벽에 갈색 문만 덩그라니 놓인 이 가게는 왠지 모르게 서울대 입구 근처의 '지구당'을 떠올리게 한다. 요란한 코리 라멘집 바로 옆에 위치한 건 우연이었을까, 의도한 것이었을까? 은근한 자신감이 느껴져 도전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 한적한 어느 오후에 들러 이 집의 덮밥 맛이 어떤지 가늠해보아야겠다.



발걸음을 돌려 카페 골목의 입구에 들어선다. 같은 정자동이지만 탄천을 가로지르는 이 동네는 거대한 주상복합 건물들로 가득한 곳이다. 그날 들렀던 스타벅스의 옆자리 손님은 곧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이주하는 일로 한껏 들떠 있었다. 아파트 단지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이 골목에서 눈에 띄는 재미있는 간판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잠바 주스도, 시카고 피자도 한때는 시대를 호령하며 손님들을 불러모았을 텐데... 최근에 생긴 재미난 토스트 가게 '에그드랍'에도 손님은 없었다. 설 당일이니 당연한 일일지 모르니 사람 붐비는 주말 오후에 다시 한 번 찾아 보아야 할까? 검색을 해도 신통한 집들은 좀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골목을 두어 번 걸은 후 항상 찾던 스타벅스에서 밀린 일들을 점검했다. 어느새 걸음 수는 7000보를 넘어서 있었다.



사실 '닐리리 만보'는 맛집 찾기 투어가 아니다. 그저 좀 더 많이 걷고 싶은 욕심에 객기를 부려 붙인 이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들어가고 싶은 마음 편한 카페 하나를 찾지 못하고 늘 가던 별다방을 찾았다. 밀그티를 좋아하지 않으니 '골목사이'라는 재밌는 카페도 선뜻 찾아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죄책감에서는 조금은 더 자유로워졌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좋은 것을 곁에 두고도 이토록 오랫동안 무심해질 수 있는 법이다. 부산의 자갈치 시장을 찾지 않았던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생선을 사러 갈 일이 없었으니까. 그곳은 내게 관광지가 아니었으니까. 정자동 카페 골목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20여 년 간 가까운 카페를 찾아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럴 일이 생기면 아주 먼 곳을 찾아 헤매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의 마음의 여유가 생겨 이 골목의 존재를 비로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단골 카페를 찾는 작업?은 이제 시작되었다. 어제의 닐니리 만보가 의미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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