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이 익살을 부리고 밝게 웃으면 웃을수록 보는 사람의 눈물, 콧물을 빼는 영화가 있다. 시대적 배경은 제 2차 세계대전, 장소는 수용소, 주인공은 유대인이라는 설정만 놓고 보면 어둡고 무거운 반전(反戰)영화가 아닌가 싶은데 이 영화는 다른 의미의 반전(反轉)을 보여준다. 메인 테마만 들어도 가슴 한켠이 초봄의 저녁처럼 시리면서도 따뜻해지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로마로 상경한 순수하고 유쾌한 시골 총각 귀도는 학교 교사인 도라에게 첫눈에 반한다. 그의 진심어린 구애는 도라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들은 조슈아라는 아들을 낳아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하지만 조슈아의 생일날 이들은 수용소에 보내지고 귀도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수용소 생활을 게임이라고 속인다. 1000점을 먼저 따면 진짜 탱크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조슈아와 특유의 낙천성과 유머를 잃지 않는 귀도의 수용소 생활은 몇 번을 봐도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감독 로베르토 베니니는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 1)의 접속부사 ‘그래도’ 앞에 와야 할 ‘아름다운 인생’의 대척점으로 전쟁을 설정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살면서 전쟁만큼 끔찍하고 두려운 상황이 흔치 않을 테지만 나름의 상황은 누구나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위기 한가운데서 발휘되는 낙천성과 유머를 지녔는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이다.
남편은 화장품 사업을 20여 년 넘게 하고 있다. 승승장구할 때도 있었지만 꽤 오랜 기간, 하도 얻어 맞아 링 코너에 몰린 권투 선수처럼 만신창이가 돼 버텼었다. 가끔 잽도 맞았지만 연속 스트레이트로 강타 당할 때면 이제 그만 쓰러지는 것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그때 남편이 이런 얘기를 했다. “지금은 아주 더운 여름 한낮이야. 그런데 내가 자꾸 당신한테 털모자를 씌워주는 거야. 씌우고, 씌우고, 또 씌우고... 엄청나게 더울 거야. 그런데 그 모자를 내가 홱 하고 한꺼번에 벗겨줄 날이 곧 올 거야. 그럼 얼마나 시원하겠어? 생각만 해도 시원하지 않아?”
아마 욕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종종 그 이미지가 떠올라 웃음이 나올 때가 있었다. ‘이번 모자는 가볍네’ 어차피 쓴 모자 하나 더 쓴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어 씌워주는 대로 쓰기도 하고 내 손으로 쓰기도 하며 지낸 그 시간이, 나에게는 접속부사 ‘그래도’ 앞에 있다. 내 손으로 벗을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게 부끄러운 지금의 나는 아마도 그때보다 조금은 자란 듯싶다. 분명한 건 예전엔 손에 쥔 떡을 빼앗긴 어린아이였다면 지금은 그 떡 없이도 살 수 있거나 다른 떡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때 눈앞이 캄캄했던 건 내가 눈을 감아버렸기 때문이란 걸 난 한참 후에 알게 되었고 남편의 낙천성과 유머가 더듬거리는 내 손을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감은 눈을 뜰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위기 한가운데서 발휘되는 낙천성과 유머를 지녔는가. 나는 그런 사람을 알고 있다. 그리고 닮아가는 것이 참 다행이다.
누군가에게는 부성애를, 또 누군가에게는 전쟁의 아픔을 느끼게 하는 이 영화에서 나는 위기 탈출법을 본다. 털모자를 잔뜩 쓰고 있으면 어떤가. 지금은 추운 겨울이라는 상상만으로 잠시 웃음이 난다.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조슈아를 안심시키던 귀도의 죽음이 마냥 슬픈 것만은 아니다. 가까이서 보면 ‘그래서’ 행복하고, ‘그래서’ 아름다운 것 같지만 역시 멀찍이 물러나서 보면 ‘그래도’ 행복하고, ‘그래도’ 아름다운 게 또 인생 아닌가.
1) <인생은 아름다워>는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가 암살 당하기 전 남긴 말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에서 모티프를 딴 제목
* 이 글은 '쓰닮쓰담'에 참여 중인 장현정님이 쓰신 글입니다. 영화에 대한 정보(F)와 자신의 경험(E)을 잘 녹여낸 글이라 고치지 않고 그대로 소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