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일간 매일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매일 탈옥을 한다. 뻘짓도 이런 뻘짓이 없다. 자나 깨나 글 걱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명이 완주를 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글을 쓴 무서운 사람들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 법이다. 우리에겐 소나기 같은 글을 쓸 능력은 없다. 그저 꾸준히 하루 하루를 기록할 뿐이다. 더 놀라운 것은 몇 시즌에 걸쳐 매일같이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성용님은 131일, 도연님은 114일차라고 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쓰게' 만드는 것일까. 5번째 시즌의 쫑파티에서 그 답을 찾았다. 이 날은 시라님이 글쓰기 주제를 가지고 왔다. 우리는 각각 다른 글쓰기 과제를 받았다. 누군가는 시를 썼고, 누군가는 육행시를 썼다. 누군가는 매일 글을 쓸 수 있는 비결에 대해, 누군가는 타인에게 선물하고픈 글쓰기의 주제를 받았다. 그렇게 시작된 수다가 끝이 없었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말 할 기회가 많지 않다. 마음을 담아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을 만나기가 그렇게 녹록치 않다. 우리가 듣는 말의 대부분은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만' 하는 말들이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광고들이다. 나는 때때로 고개를 돌리지 않으면 보지 않을 수 없는 버스 광고를 혐오하곤 한다. 그렇게 필요하지도 않은 음식과 패션 정보와 광고를 강제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디 사람들이라고 크게 다를까. 직장에서 듣는 말의 8할은 '들어야만 하는 말'들이다. 써야만 하는 글들이다. 내 얘기를 차분히 들어줄 사람을 만나기가 녹록지 않다. 집에 오면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본다. 내가 듣고 싶어하는 말과 와이프가 듣고 싶어하는 말은 서로 다른 경우가 훨씬 많다. 그래서 우리는 굳이 '글'이라는 것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푸념을, 걱정을, 흥분을, 안도를 쏟아내기 위해 우리는 매일 글을 쓴다. 그것이 비록 감옥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183일 째 글을 자다 깨어 쓴다. 며칠 간의 강행군으로 녹초가 되었다. 그럼에도 원고 하나를 내일 오후 2시까지 마감해야만 한다. 하지만 글감옥은 '써야만' 하는 글이라서가 아님에도 굳이 중간에 깨어 이 글을 쓴다. 물론 182일간 이어온 글쓰기가 아깝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매일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치유를 받는다. 나는 '평안'이 중요한 사람이다. 사람과 관계와 일에 치인 영혼을 달랠 시간이 필요하다. 그 방법이 내겐 바로 '글쓰기'였다. 나는 '소통'이 중요한 사람이다. 왁자지껄 회식 자리에선 쉬이 피로를 느끼지만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선 언제나 위로를 얻곤 한다. 굳이 찾아와 댓글을 달아주는 사람들에게서 숨길 수 없는 위안을 얻는다. 또한 나는 '도전'이 중요한 사람이다. 매일 글을 쓰는 과정 자체가 내게 묘한 성취감을 가져다 준다.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 충만함을 누린다.
물론 사람마다 글을 쓰는 이유는 조금씩 다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 우리의 '수다 본능'이 있다고 믿는다. 매번 모여 수다를 떨 수 없기에 우리는 글을 써서라도 소통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위로를 얻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또 다른 하루에 도전할 힘을 얻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2주 간의 쉬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또 다른 여섯 번째의 시즌을 언제나처럼 맞을 것이다. 그리고 매일같이 수다를 떨 것이다. 굳이 누군가가 읽어주지 않아도(물론 나는 거의 모든 글을 읽는다) 내 영혼을 위해 수다를 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글의 수다를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기 발견'의 욕구 때문은 아닐까?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배우기 위해, 이렇게 영혼을 탈탈 털어내야만 하는 글쓰기에 매달리는 것은 아닐까? 지금 시간은 11시 21분, 39분을 남겨 놓고 오늘의 탈옥을 감히 감행한다. 12시가 되면 다시 갇히겠지만. 그러나 나는 이 과정이 정말로 '황홀'하다.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 오늘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수다를 떨었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벌써부터 6번째 시즌이 기다려지는 오늘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