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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연필을 쓰는 사람들의 '흑심'

이름마저 센스 있다. '흑심'이라니. 영어 표기마저 Black Heart다. 새까맣게 타들어갔던 몇 몇 일들이 떠오른다. 외국인들이 이 단어를 본다면 어떤 마음이 들지 궁금하기도 하다. 하지만 연필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네이밍이 있을까 싶다. 흑심을 품고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어떤 남자는... 그조차도 어쩐지 해피엔딩으로 끝날 거 같은 느낌.


연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나는 매일 아침 단어 수를 세어가며 글을 쓰고 있는 헤밍웨이의 구부정한 모습이 떠오른다. 마지막까지 연필을 쓰는 소설가로 남아있던 김훈도 떠오른다. 그는 아직도 그 긴 장편 소설을 쓰고 있을까? 물론 나는 연필을 거의 쓰지 않는다. 그래도 언제나 갖고 싶은 아스라한 추억의 이름, 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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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은 나무와 흑연으로 만들어진다. 언젠가 연필 만드는 기계의 동영상을 한참동안이나 들여다본 기억이 있다. 왠지 모르게 그 연필 특유의 냄새가 전해져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쓰지도 않을 연필을 사서 연필깎이로 깎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기차 모양의 연필깎이를 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었다.


연필의 매력 또 한 가지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헤밍웨이처럼 연필에 얽힌 이야기는 파고 파도 또 나오는 화수분이다. 볼펜마저 힘을 잃어가고 키보드의 타이핑 소리만 요란한 지금도 그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빈티지 연필에 열광하는 것은 그 '쓰임새' 때문만은 아니다. 필요를 넘어선 스토리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비로소 문구 덕후, 연필 덕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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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비즈니스맨들은 롤렉스와 몽블랑을 산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나는 연필을 사고 싶다. 돈은 없지만 격은 지키고 싶어서다. 가심비 높은 남자의 (물론 여자도) 액세서리다. 300년 이상 된 파버 카스텔이나 연필의 대명사 스테들러를 사들면 행복해진다. 나라도 역사도 이야기도 다른 빈티지한 연필들이 아직도 세상엔 넘쳐난다.


연남동 골목길엔 이런 아름다운 '흑심'들을 모아놓은 가게가 있다. 어느 빛 좋은 봄날에 이 곳을 방문하고 싶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까봐 마음 한 켠에 설렘을 접어 놓는다. 이 희소한 연필 덕후의 쉴 곳을 만들어준 이 곳이 보기도 전에 사랑스럽다. 벌써 수년 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다할 나위 없이 고맙다. 여전히 연필을 쓰는, 아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나의 '흑심'을 들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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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끌리는 가게들이 있다. 자신의 마음을 담은 가게들이다. 작지만 큰 울림이 있는 브랜드가 있다. 자신이 파는 것들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만든 탓이다. 이런 브랜드는 굳이 마케팅에 애를 쓸 필요가 없다. 흑심 가득한 사람들이 써놓은 훈훈한 홍보글들이 녹색 검색창만 쳐도 넘쳐나니까 말이다. 나같은 소심한 덕후들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는 힘, 그것이 감히 '브랜딩'이 아닐까 생각해보는 오늘이다.






* 이 컨텐츠는 '중소상공인희망재단'과 함께 만들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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