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는 나의 힘 #02.
가끔씩 아이돌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의 눈빛이 살짝 흔들릴 때가 있다.
40대 중반의 아저씨가 아이돌을 이야기하면
세상의 다양한 가치를 수용하는 오픈 마인드로 읽힐까
아니면 양복과 주름 속 깊은 곳에 숨은 음흉함을 떠올릴까
상대가 어느 쪽이든 항상 후자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갈수록 과격? 해지는 작금의 아이돌 콘셉트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 위험을 불사하고 아이돌을 자랑스러워하던 때가 있었다.
굳이 내가 아이돌의 열혈 삼촌팬이 아니더라도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K-POP에 빠져 몸을 흔들고
수 만의 군중이 운집한 공연 실황을 보노라면 우쭐해졌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간혹 그들의 음악에 훅(hook)하여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게 될 때면
그 팀이 그 팀 같은 그들의 맹목적인 음악 스타일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음을 인정하곤 했다.
하지만 '나인뮤지스: 그녀들의 서바이벌'이라는 다큐를 우연히 접한 후로는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그 뻔하디 뻔한 뮤비 한편을 찍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고 서슬 퍼런 경쟁과 눈물의 레이스를 펼쳐야 했는지를
딸을 바라보는 아빠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음악적 평가나 상업적인 시스템은 일단 뒤로 하자.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무엇이 이들의 청춘을 출구 없는 치킨게임의 레일 위로 올려놓고 있는지를.
그 무엇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간들을 아낌없이 희생시켜가며
불나방처럼 자신의 몸을 태우는 이 비정한 경쟁의 대열을 계속하게 하고 있는지.
조선일보를 나와 다큐 영화를 찍던 이호준 감독은
한창 기세를 높이던 아이돌 그룹의 성장 과정을 카메라에 담기로 한다.
몇몇 대형 기획사의 문을 두드렸으나 거절당하기를 몇 차례,
결국 당시 데뷔 이전이던 걸그룹 '나인뮤지스'의 연습과정을 기록하게 된다.
치열하고, 매정하고, 숨 막히는 걸그룹의 탄생 과정은
그렇게 가감 없이 감독의 카메라에 낱낱이 담기기 시작한다.
욕설과 분노, 좌절과 욕망이 시종일관 팽팽하게 화면 위를 오간다.
어느 순간 이 다큐가 '걸그룹'의 탄생과정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
혹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이도 함을 깨닫게 될 때
나모 모르게 작은 탄식을 흘리게 된다.
다큐가 후반부를 향해 달릴 때쯤
온갖 풍파를 겪고 난 후 상처만 가득한 걸그룹 '나인뮤지스'는 데뷔를 한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뜨지' 못한다.
그리고 아직도 그들의 이름은 '뜨지' 못했다.
초기 멤버의 대부분이 바뀐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나인뮤지스'는 낯선 걸그룹의 이름일 뿐이다.
하지만 다큐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게 될 것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언젠가는 '뜰 것'이라는 얄팍한 희망이
어떻게 우리들의 삶을 조금씩 갉아먹어가며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는지를.
걸그룹을 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가 주목한 것은 단 하나,
이들이 그 수많은 좌절을 감내해가며 다다르고 싶어 하는 곳은 어디일까?
너무 힘들고 지쳐 연습실을 도망쳐나갔다가도
결국 돌아와 새벽부터 춤과 노래를 연습하게 하는 그 힘은 무엇일까다.
그리고 이 질문은 고스란히 나에게도 되풀이된다.
내가 그토록 힘겹게 통과해왔던 인생의 힘든 순간들을 돌아보며 묻는다.
그것은 과연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경험들이었는가.
어떤 경험은 그랬고
또 어떤 경험은 그러지 못했다.
'나인뮤지스'란 걸그룹은 결국 뜰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 속에 속한 민낯조차 예쁜(감독의 표현이다) 각각의 멤버들 역시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성공과 실패 이면의 행복이다.
설사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춤과 노래, 대중과의 소통에 만족한다면 그 삶은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인기와 명예, 부를 얻는다 할지라도
그 과정이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비록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다음 날의 무대가 가슴 설레게 기대된다면
설혹 걸그룹이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는 성공한 인생이라 스스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멤버들의 사진과 이름이 화면을 메우며 간단한 코멘트가 붙는다.
홈쇼핑 모델이 되기도 하고, 다른 그룹의 멤버로 옮겨가기도 한다.
그리고 몇몇 멤버는 그대로 남아 기약 없는 성공을 위한 강행군을 계속하기도 한다.
이 걸그룹을 기획한 디렉터는 여전히 성공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큐가 나온지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인뮤지스'의 존재감은 미약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복을 응원하게 된다.
홈쇼핑 모델을 하건, 걸그룹으로 남아 치열한 서바이벌 게임을 이어가건
부디 그 일이 성공의 여부와 상관없이 '가슴 설레는' 일이기를.
후회 없는 선택의 과정이기를.
그래서 누군가에게 말해줄 수 있기를.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행복했노라고.
그래서 얄팍하고 짧은 누군가의 성공 앞에서 절망하지 않기를.
인생의 레이스 중반부를 함께 달리고 있는
이 작은 응원을 기억해주기를
속으로 나지막이 읊조리게 되는 것이다.
“내 눈에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보며 내가 내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도 됐다.
다큐멘터리를 하는 작업은 나를 만나는 작업 같은데
내가 내 인생을 행복하지 않게 살아서 그렇게 찍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도 세라처럼 목표지향적인 사람이다.
과정을 힘들게 견디고 나서 목표를 거머쥐면 그 기쁨이 오래가지 않았다.
스타가 되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20년 넘게 먼저 산 나도 목표한 것을 거머쥐더라도
행복해지지 않으니까 그렇게 보인 것 같다.
이런 생각은 꼭 나인뮤지스만에 한정돼 있지 않다.”
- 이학준, '나인뮤지스: 그녀들의 서바이벌'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