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오래 함께
아침 핸드폰이 울렸을 때, 화면에는 부고 알림이 떠 있었다. 그 아래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조문 메시지들이 연달아 올라오고 있었다.
27년 전, 아이들이 코흘리개였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참 오래도록 함께해왔다. 그때가 떠오른다. 처음 만났던 날, 카이스트 연못 근처 잔디밭에 앉아, 아이들은 오리를 따라 뛰어놀게 두고 우리는 육아 고민을 나누며 “어떻게 하면 함께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까?” 이야기하던 날들. 잔디밭에 아이들이 넘어질세라 따라다니느라 정신없던 젊은 엄마 아빠들은, 어느새 세월이 흘러 모두 중년이 되었다.
누구의 아이 할 것 없이, 마치 모두의 아이인 듯 우리는 가족처럼 지냈다. 한 집 아이가 아프면 모두가 함께 걱정했고, 누군가 좋은 일이 생기면 내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다. 그러다 그 아이 중 누가 결혼을 하면, 마치 총동창회를 하듯 아이들과 부모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자녀를 축복했다. “벌써 시집을 가네”라는 말 속에는 분명한 기쁨이 있었지만, 동시에 설명하기 어려운 허전함도 함께 배어 있었다. 아이들이 한 세대 앞서 나아가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조금씩 뒤로 물러나는 존재가 되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또 종종 장례식장에서 얼굴을 마주한다. 검은 옷을 입고 서로의 어깨를 다독이며, 젊은 날을 함께했던 친구의 부모를 떠나보내는 순간이다. 그때마다 세월의 무게가 한층 더 깊고 묵직하게 다가온다. 굳이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를 건넬 수 있었다.
오늘 늦은 오후, 부천의 장례식장에 문상을 다녀왔다. 무더운 여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도 동시에 마음 한편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문득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이제 우리의 만남은 아이들의 결혼식장과 부모님의 장례식장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그렇다고 해서 마냥 슬프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인생의 앞과 뒤가 교차하는 그 자리에서, 함께 늙어가는 동지 같은 연대감이 오히려 묘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챙기고 있었고, 예전처럼 같은 마음으로 함께 웃고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 고맙게 다가왔다.
결국 인생은 아이들을 키우고 부모를 떠나보내며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그 강가에서 오랜만에 마주한 우리는, 비록 찬란했던 젊음은 지나가고 얼굴에는 주름이 늘었지만, 여전히 같은 시간을 함께 살아온 벗으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