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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만둣국, 낯선 맛의 발견

고정관념을 녹인 한 그릇

by 리베르테

에어컨 아래에서도 끈적한 열기가 가시지 않던 한여름, 후배와의 점심 약속을 위해 밖으로 나섰다.


"언니, 만두 좋아하시죠? 유명한 만둣집이 있어요. 그곳에 가요“


나는 유난히 만두를 좋아한다. 떡국과 만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만두를 택하고, 욕심이 난다면 두 가지를 함께 먹을 수 있는 떡만둣국을 주문하는 편이다. 이런 나의 음식 취향을 잘 아는 후배의 제안에 선뜻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유성에 있는 노포 유성 만둣집으로 향했다. 좁은 골목길에 주차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이런 불편함마저 맛집의 증거처럼 여겨졌다. 낡은 간판과 오래된 건물이 세월의 깊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메뉴판을 보던 중 낯선 이름이 눈에 띄었다. "냉 만둣국." 보기도 듣기도 처음인 메뉴였다. 만둣국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했던 나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조합이었다. 더위에 지친 우리는 호기심 반, 기대감 반으로 그 낯선 메뉴를 주문했다.


"이런 만둣국이 있다니, 정말 신기하네.""어떤 맛일까?“


우리의 수다를 끊고 냉 만둣국이 도착했다. 커다란 국그릇에 담긴 차가운 동치미 국물 위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만두 다섯 개가 떠 있었고, 가는 소면이 국물 사이사이에 흩어져 있었다. 만두 위에는 꾸미로 올려진 채쳐친 오이와 달걀지단이 푸짐하게 올려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함이 느껴지는 동치미 국물의 맑은 색깔과 뜨거운 만두의 대조가 시각적으로도 신선했다.


첫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는 순간, 예상 밖의 조화로움에 놀랐다. 차가운 동치미 국물이 목구멍을 시원하게 적시고, 뜨거운 만두를 베어 물면 고기와 부추가 어우러진 속이 입안에 퍼졌다.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이 부딪히면서 생기는 온도의 대비가 오히려 더위에 지친 몸에 활력을 주었다. 소면은 국물의 시원함을 더해주며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한 입, 두 입 먹어갈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처음 먹어보는 조합인데 전혀 낯설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맛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그때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설날이 다가오면 우리 집은 며칠 전부터 만두 만들기로 분주했다. 엄마는 돼지고기와 두부, 당면, 그리고 신김치로 정성스레 만두소를 만들어주셨고, 거실 바닥에 둘러앉아 하루 종일 만두를 빚었다. 우리 가족만 먹을 양이 아니라 이웃과 친척들에게 나눠줄 만큼 많은 만두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린 나는 서투른 솜씨로 삐뚤빼뚤한 만두를 만들면서도, 완성된 많은 양의 만두가 쟁반 위에 가지런히 줄지어 놓인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냉 만둣국을 먹으며 그런 추억이 되살아나는 것은 만두라는 음식이 주는 친숙함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친숙한 만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왜 나는 이런 조합을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숟가락을 놓으며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만두는 뜨거운 국물에 끓여 먹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차가운 국물과 뜨거운 만두라는, 언뜻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 이렇게 훌륭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경험의 틀에 갇혀 있었을까. 보고 겪은 것만으로 세상을 재단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냉 만둣국 한 그릇이 내게 준 깨달음은 단순한 음식 경험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정말 맛있네. 이런 음식이 있는 줄 몰랐어. 내가 가진 고정관념을 깨뜨려준 음식이야“


후배도 만족스러워하며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깨끗이 비웠다. 우리는 식당을 나서며 다음에 또 와보자고 약속했다.


세상에는 아직 내가 모르는 낯선 것들이 무수히 많다. 새로운 것은 때로 불편하고 부담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냉 만둣국을 맛있게 먹었던 것처럼, 고정관념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낯선 것들을 받아들인다면 어떨까.


앞으로는 밀어내기만 했던 삭힌 홍어무침도 맛보고, 올레 길도 혼자 걸어보며,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만남도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싶다. 그렇게 하나씩 낯선 경험들을 내 삶에 쌓아가다 보면, 어느새 더 풍성하고 유연한 내가 되어 있지 않을까.


그날의 냉 만둣국은 단순한 점심 한 끼가 아니라, 내게 새로운 시각을 선물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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