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7
‘당시에 나는 흔히들 말하는 대로 ‘우연’에 의해 특이한 도피처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런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찾아내면,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우연이 아니라 그 자신이, 그 자신의 욕구와 필요가 그를 그것으로 인도한 것이다.‘ <데미안 p130>
나는 왜 이곳까지, 이 먼 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데미안에 나오는 구절처럼 '우연'에 의해 특이한 도피처를 찾아낸 것일까? 그러나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데, 그렇다면 나는 내게 절실한 무엇을 찾아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무엇을! 굳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그냥 떠나고 싶었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멀어짐, 그것이 주는 생경함. 그렇게 살아보고 싶었다.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하고 잠깐 잠이 들었다. 잠들어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잠은 멀리 달아났다. 잠이 오지 않으면 자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강박처럼 자야 한다고 주문을 걸었다. 하지만 생각이 많아질수록 잠은 더 멀리 달아났다. 일어나 앉아 뭐라도 읽고 쓰자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거부했고, 결국 따뜻한 이불속에서 생각의 늪에 빠져들었다.
오전 7시 알람 소리에 깼지만, 카톡에 회의 참가 연결 링크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잘못 맞춰두었나 생각했다가 살짝 다시 잠이 들었다. 일어나 보니 7시가 이미 지났고, 줌미팅에 어서 참여하라는 유니님의 문자가 와 있었다. 서둘러 노트북을 열어 미팅에 참여했으나, 비디오 연결에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나만 그랬을 뿐, 다른 참여자들의 얼굴은 볼 수 있었기에 충분했다. 반가운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 유익한 이야기를 들으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감정이 밀려왔다. 마음 한편으로 모두가 성장하는 사이 나만 제자리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비교는 타인이 아니라 어제의 나와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생각이 찾아왔다. 누구나 자신만의 속도가 있고, 내 속도에 맞춰 천천히 이상적인 나와 현재의 나 사이 간극을 줄여가면 된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많은 생각이 밀려들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럴 땐 몸을 움직이는 것이 좋다. 생각이 복잡할 때는 활발히 움직이며 정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줌미팅에 참여하는 동안, 아이가 아침 운동 준비를 하고 내려왔다. 이곳에 온 후 매일 달리기를 하는 아이였다. 눈이 오고 추운 날씨라 걱정했더니 아이는 "달리면 몸이 더워지고 땀이 나요. 차고 앞 눈을 치우고 달리고 올게요"라고 말했다. 이곳에 오면 눈 치우는 일이 있을 거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듣고 문득 시골 고향집에서 눈 치우던 추억이 생각나 좋았다. 아이와 함께 눈을 치우면 오래전 추억 속으로 돌아갈 것 같았지만, 결국 이곳에 와서 눈을 치우는 첫 번째는 아이 혼자 하게 되었다.
미팅을 마치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밤 10시를 훌쩍 넘긴 시간. 잠깐만 누워있으려 했는데 깊은 잠에 빠졌다. 아이가 저녁을 먹어야 한다며 깨웠다. 밥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이곳에 와서 두 번째로 하루 종일 단식이었다. 저녁 당번은 내가 맡았지만, 밥 생각이 없다고 하자 아이는 알아서 먹겠다고 했다.
이내 맛있는 냄새가 진동해 1층으로 내려왔다. 아이가 저녁준비 중이었다. 닭고기를 버터에 굽고, 새우, 피망, 아스파라거스, 양파 등을 넣은 야채볶음이었다. 접시의 구운 닭고기와 야채볶음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젓가락을 들고 "맛을 봐도 될까?"라고 물었더니,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그럼요!"라고 대답했다. 피망과 새우를 한입에 먹어보니 미각을 확 깨우는 맛이었다. "오, 정말 맛있네! 어떻게 만든 거야?"라고 묻자 "특별한 건 없어요. 닭살을 먼저 구운 후 야채를 넣고 소금과 후추로만 간했어요"라고 대답했다.
이곳에 와서 지내며 아이와 나의 식성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립적으로 살면서 도시락까지 준비하는 아이는 요리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요리 범주가 나보다 훨씬 넓어 보였다. 나는 한식위주로 요리하는 반면, 아이는 다양한 요리에 도전한다.
접시에 구운 닭고기와 야채를 잘 어우러지게 담아 먹고 뒷정리까지 깔끔하게 마친 아이 옆에서 나는 글을 쓰고 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으로 보낸 하루 같은데,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글이 길어졌다. 이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