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한 하루, 그래도 지나간다

D-20

by 리베르테

아침 공기가 차가웠다. 새벽부터 내린 눈이 길가에 소복이 쌓였고, 나는 두꺼운 외투를 입고 산책길로 나섰다. 눈인지 비인지 모를 무언가가 부슬부슬 내렸다. 아직 인도는 제설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어제 내린 눈으로 덮여 있었고, 하얀 눈 위를 밟을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마치 아침 인사처럼 들려왔다.


거리는 한적했다.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공원에는 눈을 치우는 덤프트럭 몇 대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에서 가장 많이 보는 풍경이다. 눈이 얼마나 빠르게 치워지는지 놀랄 정도다. 몇 번이고 덤프트럭 소리에 잠이 깬 적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정도로 눈이 내리지 않아서인지 제설 차량이 흔하지 않은데, 이런 장비가 있다면 제설작업이 훨씬 효율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내린 다음 날이면 도로 위로 커다란 덤프트럭이 지나가며 눈을 치우는 모습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다. 덤프트럭 앞부분의 양옆에 날개처럼 달린 장비로 눈을 밀어내며 깨끗하게 정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인도와 공원 산책길 역시 작은 덤프트럭이 오가며 눈을 치우고 있었다. 다니는 사람도 몇 명 되지 않는 공원까지 이렇게 꼼꼼하게 치우는 모습을 보니,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이들의 노고가 오늘따라 더욱 고맙게 느껴졌다.


유난히 추운 날씨 탓인지 공원에는 나와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아주머니 두 분뿐이었다. 공원 산책로를 걷다가 눈을 치우며 다가오는 작은 덤프트럭 한 대와 마주쳤다. 감사한 마음으로 손을 흔들며 인사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 기사님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먼저 웃으며 손을 흔들자, 기사님도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셨다. 말 한마디 없이도 마음이 통할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아주머니가 눈에 띄었다. 몽실몽실한 털을 가진 작은 강아지가 신나게 눈밭을 뛰어다녔다. 이곳은 공원에 강아지를 자유롭게 풀어놓는 모습도 많이 볼 수 있다. 활짝 웃으며 "굿모닝!" 하고 인사를 건넸다. 아주머니도 환하게 웃으며 "굿모닝!"이라고 화답해 주셨다. 이곳에서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굿모닝"일지도 모르겠다. 추운 날씨에도 짧은 인사 한마디가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 주는 듯했다.

산책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와 간단한 아침 식사를 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아침을 먹고 스타벅스에 가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지만, 바람이 너무 거세고 날씨가 추워 계획을 변경했다. 아이도 아침에 달리기가 추웠는지 밖에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따뜻한 집 안에서 조용히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온종일 무력감이 나를 감쌌다. 해야 할 일도 있었지만 손이 가지 않았고, 몸도 마음도 축 처지는 기분이었다.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바깥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가끔 이런 날이 있긴 하지만, 오늘은 유난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책을 펼쳐 보기도 했고, 음악을 틀어 보기도 했지만, 그 무엇도 오래 집중할 수 없었다. 창밖에서는 바람이 거셌고, 가끔씩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만 이렇게 느끼는 걸까? 혹시 저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무력할 땐 몸을 움직이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늦은 오후가 되자 다시 한번 산책을 나섰다. 아침 산책이 조금이나마 기분을 나아지게 했으니, 저녁 산책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이번에는 마을 골목길을 지나 공원으로 향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지만, 서늘한 바람을 맞으니 한결 숨이 쉬어지는 듯했다. 해는 저물고 싸늘한 공기 속에서도 평온함이 느껴졌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분으로 천천히 걸었다.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저녁을 차렸다. 얼마 만에 해보는 저녁 준비일까? 저녁당번이 통 제 역할을 못했다. 오늘은 두부조림과 감자볶음, 김을 반찬으로 간단하게 차려냈다. 반찬은 두 가지 이상 만들지 않기로 했기에 이 정도면 충분했다. 오늘의 두부조림이 제법 한국의 맛이 났는지, 아이가 밥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집 안에 퍼지는 따뜻한 음식 냄새가 어쩐지 위로처럼 느껴졌다.

비록 특별한 일 없이 흘러간 하루였지만, 이런 조용한 날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루를 돌아보며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셨다. 무력감에 지배당한 날이었지만, 아침 산책길에서 나눈 반가운 인사, 저녁 산책 후 마신 차 한 잔, 그리고 아이와 함께한 저녁 식사가 있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흘러갔다. 내일은 조금 더 활기찬 하루가 되길 바라며,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했다.


무력한 하루를 보내는 것도 때로는 삶의 일부다. 그런 날엔 억지로 벗어나려 하기보다, 조용히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는 것도 방법일지 모른다. 그래도 우리 주변에는 작은 위로들이 숨어 있다. 따뜻한 차 한 잔, 창밖으로 스치는 바람, 누군가와 주고받는 짧은 인사처럼 말이다.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자. 분명 오늘도, 어딘가에 우리를 위로해 줄 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도로의 눈을 치우는 커다란 차량

- 인도의 눈을 치우는 작은 차량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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