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8
아침에 책을 읽고 있는데, 아이가 달리기를 하고 오겠다며 나갔다. 아이가 돌아와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공원 산책을 가기 위해 채비를 했다.
"엄마, 길이 많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하세요. “
이제는 나를 걱정하는 아이의 모습에서, 세월이 참 많이 흘렀음을 실감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아이를 걱정하며 조심하라고 당부했는데, 이제는 역할이 바뀌었다. 창밖을 보니 하얀 눈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 마치 크리스마스 카드 속 풍경 같았다.
오늘은 어제보다 이른 시간에 산책을 나섰다. 마침 아이들의 등교 시간이라, 공원에는 두툼한 패딩을 입은 아이들이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종종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곳 아이들은 추위에도 익숙한 듯 보였다. 그동안 도로 건너편의 학교만 보았는데, 공원을 가로질러 가보니 또 다른 학교가 있었다. 평소엔 한적하다고만 여겼던 이곳에 학교가 두 군데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아이들이 오가는 아침 풍경이 생기가 느껴졌다.
이곳만의 특별한 점은 운전자들의 배려였다. 학교 근처라서 차들이 유난히 천천히 다녔고, 'STOP' 표지판 앞에서는 보행자가 없어도 반드시 멈췄다. 문득, 얼마 전 달리기를 하고 온 아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 여기 운전자들은 정말 달라요. 건널목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저를 위해 멈춰 주시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에요. “
아이의 말처럼, 이곳의 배려 문화는 참 특별하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배려가 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건널목에서 차가 멈추면 서둘러 건너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들기도 하고, 이런 배려를 어떻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될 때도 있다.
공원 커다란 나무 뒤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니, 아이들이 눈을 쌓아 이글루를 만들고 있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아이들이지만, 눈이 오면 신나서 뛰어노는 모습은 어디에서나 같았다. 눈덩이를 던지고 깔깔대는 아이들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공원 놀이터의 미끄럼틀과 그네는 하얀 눈으로 덮여 고요했다. 지금은 어린아이들이 놀기엔 추운 날씨지만, 곧 봄이 오면 아이들이 이곳에서 뛰노는 모습을 볼 수 있겠지. 계절이 바뀌는 이곳의 풍경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질 것 같다.
날씨 탓인지 몸도 마음도 움츠러드는 요즘이다. 짧은 여행이라면 하루하루가 아쉬워 이곳저곳을 서둘러 다녔겠지만, 몇 달간 머무는 지금은 다르다. 시간이 물처럼 흐르고, 이곳에서의 일상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는 않다.
가끔은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이 낯설고, 사소한 차이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렇지만 그 과정조차도 이곳을 알아가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마치 장편소설을 읽듯, 천천히 이곳의 풍경과 사람들을 알아가고 싶다.
오후가 되자 아이는 근처 마트에 아이스크림과 우유를 사러 갔다. 추운 날씨에도 아이스크림을 찾는 걸 보니, 이곳의 기후에 제법 적응한 모양이다. 나는 해 질 녘 산책을 나섰다. 하늘은 어둠으로 물들고, 집집마다 하나둘 노란 불빛이 켜지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가족들의 모습이 정겨웠다.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가족, 소파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각자의 방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 시간이 참 따뜻해 보였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우리도 식탁에 마주 앉아 오늘 하루를 이야기했다. 이렇게 하루하루 쌓여가는 시간이 우리의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간다. 언젠가 이 시간을 추억할 날이 오겠지. 그때는 또 어떤 마음으로 이 순간을 떠올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