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1
새벽, 거센 바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마치 지붕이라도 날아갈 듯한 세찬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창을 열어보니 나무들이 부러질 듯 요동쳤다. 한참을 그렇게 뒤척이다가 나도 모르게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자 온 세상이 다시 하얗게 변해 있었다. 밤새 눈이 온 건지, 아니면 바람에 날린 눈이 다시 쌓인 건지 알 수 없었다. 공원은 아직 제설 작업이 되지 않아 발걸음을 내딛기가 어려웠다. 여전히 바람이 거세게 불었지만, 오랜만에 맑게 갠 파란 하늘이 반가웠다. 캐나다의 겨울을 제대로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아들과 함께 캐나다에서 세 달을 산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다양한 곳을 여행하며 색다른 경험을 하면서 맛있는 음식과 멋진 풍경을 즐기며 특별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떠올릴 것 같다. 하지만 나의 하루는 그저 동네를 산책하고, 공원을 걷는 소소한 일상의 반복이다. 어쩌면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시간이라 느껴질 수도 있다.
문득 생각했다. ‘여행’과 ‘살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여행은 짧은 기간 머무르는 것이고, 살이는 최소 한 달 이상 그곳에 머물며 살아가는 것일까? 나는 이곳에서 세 달 후면 다시 돌아갈 예정이니, 결국 여행객인가, 이방인인가.
내가 원했던 건 기존의 여행과는 다른 형태였다. 며칠 머물다 떠나는 일정이 아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지내고,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그런 여행. 단순히 일상을 벗어나기 위한 도피가 아니라, 낯선 곳에 머무르며 그곳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는 여행이었다.
나는 이곳에서도 일상을 산다. 아침에 산책을 하고, 밥을 짓고, 청소를 하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아이와 함께 거리를 걷고, 서점과 빵집에 들르고, 장을 보며 하루를 보낸다. 한국에서의 생활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다만, 조금 더 불편할 뿐이다. 마트까지 20분을 걸어가야 하고, 장을 본 후 무거운 가방을 메고 돌아와야 하며, 작은 물건 하나를 사기 위해서도 한참을 걸어야 한다. 어쩌면 지금 내가 하는 ‘살이’란, 낯선 곳에서 불편함을 겪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낯선 환경이 불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편안함,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해방감. 오롯이 나 혼자 하루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점도 색다르다.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쓰고, 온전히 나 자신을 탐색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처럼 다양한 실험을 하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이곳에서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 보려 했지만, 여전히 익숙한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가령, 매일 새로운 카페를 찾아가거나, 이곳의 문화를 깊이 경험하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비슷한 루틴 속에 머물러 있다.
김영하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 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작가의 말처럼 '여행'이든 '살이'든, 결국 그것을 통해 나 자신을 더 알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아이와 함께 소소하게 서로를 챙기고, 각자의 공간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일을 하며 보내는 하루. 이런 모습은 한국에서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굳이 이 먼 곳까지 와서 이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때로는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을 때,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진다. 그럴 때는 낯선 곳의 공기와 풍경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된다. 익숙한 곳에서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 감정들도 새로운 곳에서는 가볍게 느껴진다.
지금 나는 그렇게, 낯선 곳에서의 일상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