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3
밤새 눈이 내렸다. 이곳에 와서 이렇게 많은 눈을 본 건 처음이다. 하얀 눈이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오늘은 일요일, 줌으로 독서 모임이 있는 날이다. 하지만 처음으로 망설여졌다. 이불속에서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마음은 그대로 눕고 싶었지만, 어느새 몸은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문득 ‘하기 싫은 일을 할 줄 알아야 일류가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꼭 일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일주일에 한 번 반가운 사람들과 유익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지금 내게 꼭 필요한 시간이 되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교회에 조금 일찍 가자는 연락이었다. 서둘러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어제 눈이 많이 와서 도로 사정이 걱정됐지만, 막상 가보니 도로는 깨끗했다. 밤새 제설 작업을 한 것이 분명했다. 우리나라였다면 이 정도의 눈이 쌓였을 때 도로 상황이 어땠을지 상상이 됐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거대한 나무들이 낮은 집을 감싸고, 그 위로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도로 옆 울창한 숲 속에 자리한 집들은 커다란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마치 원래 있던 나무를 그대로 두고 그 사이에 집을 지은 듯한 모습이었다. 자연을 존중하며 지어진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곳곳에서 집 앞 눈을 치우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삽을 들고 눈을 치우는 모습이 활기찼다. 반바지, 반팔 차림으로 눈을 치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가족들이 모두 나와 눈을 치우는 광경이 마치 신나는 놀이 같았다. 한쪽에서는 눈싸움을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도 있었다. 누군가는 일하고, 누군가는 놀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교회에 도착했다. 여유가 생겨 2층 도서관에 올라갔다. 신간 코너에 읽고 싶은 책들이 눈에 띄었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다 읽지 못했기에 찾아봤지만, 이미 대여 중이었다. 대신 손에 잡힌 책이 『음악 소설집』이라는 단편 소설이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다섯 명의 작가가 음악을 테마로 우리의 일상을 풀어낸 이야기가 흥미로웠고, 한 권에서 여러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아마도 우리 아이들 모두 음악을 하고 있어서 ‘음악 소설집’이라는 제목이 더욱 끌렸던 것 같다. 돌아보면 우리 가족의 대화 속에서도 음악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캐나다 온타리오주 남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 중 하나로 꼽히는 ‘던다스 밸리’를 둘러보았다. 모레 하이킹을 가기로 했는데, 미리 답사차 가보았다. 눈이 많이 내려 아이젠을 착용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신발에 짧은 스키 스케이트 같은 장비를 장착하고 걷는 사람을 만났다. 처음 보는 장비라 신기했다. 눈이 많은 지역에서는 겨울철 장비가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차고 앞 눈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아이는 오늘 처음으로 눈을 치우던 옆집 아저씨와 인사도 나누었다고 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저녁 산책을 나섰다. 길을 가다 보니 근처 이웃집에서도 아이들이 눈을 치우고 있었다. 장난을 치듯 즐겁게 삽질을 하고, 한 명은 가정용 제설 장비를 밀고 있었다. 제설 기계를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나는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고, 아이들은 환하게 웃으며 “OK!”라고 했다. 물론 나는 우리말로, 아이들은 영어로 대답했지만, 바디랭귀지는 통했다.
공원으로 가는 길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고 신발 속으로 눈이 들어왔다. 오늘은 인도의 제설 작업이 되지 않아 공원까지 걸어가는 게 망설여졌다. 결국 돌아와야 했다. 나를 본 아이는 “운동이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게 되죠.”라며 웃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었다. 아이는 2층으로 올라가고, 잠시 망설이다가 답답한 마음에 다시 옷을 챙겨 입었다. 마을 길 끝에 있는 공원으로 가는 좁은 길이라면 눈이 치워져 있을지도 몰랐다. 예상대로 걸을 수 있을 만큼 눈이 치워져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공원으로 나갈 수 있었다. 어둠이 내릴 때까지 한참을 걸었다.
공원에서는 눈 속에서 뒹구는 아이들, 놀이터에서 썰매를 타는 아이들이 보였다. 주말이라 가족 단위로 나와 신나게 노는 모습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돌아오는 길, 반가운 한국말이 들렸다. 아이들 다섯 명이 한국어로 떠들며 눈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중 한 아이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나도 활짝 웃으며 “안녕?” 하고 인사했다. 외국에 나오면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이렇게 반갑구나.
오늘도 자유로웠다. 주어진 시간 속에서 하고 싶은 것만 하며 하루를 보냈다. 과연 다시 이런 시간을,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조용하고 한적하게, 느리고 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복잡한 생각과 무겁고, 뻐근하고, 아린, 그래서 피하고 싶은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하지만 결국 나는 안다. 오늘도 나는 피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