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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길, 다른 풍경

방향을 틀면 보이는 것들

by 리베르테

무작정 집을 나섰다. 하얀 눈이 치워진 마을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공원에 도착했다. 공원 중간중간은 아직 치워지지 않은 눈이 쌓여 있었다. 그 길을 지날 때마다 눈길에 발이 푹푹 빠졌다. 추위에 적응되었는지 움츠러들기보다는 오히려 익숙해진 듯 견딜 만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는데, 제설 차량 두 대가 다가와 공원의 눈을 깨끗하게 치워주었다. 고마운 마음에 손을 들어 인사했다. 눈보라를 일으키는 차가운 공기가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때때로 시린 바람이 죽어 있던 세포를 깨우듯 온몸을 찌릿하게 만들 때가 있다.

공원에는 나와 한 청년, 단둘뿐이었다. 그는 달리고, 나는 걸었다. 그가 지나칠 때마다 들려오는 경쾌한 음악이 공기의 흐름을 바꾸는 듯했다. 공원에 수북이 쌓인 하얀 눈이 눈부셔서 자꾸만 얼굴을 찡그리게 했다.


오늘은 늘 가던 방향이 아닌 반대쪽으로 걸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매일같이 찾던 공원이 마치 낯선 곳처럼 보였다. 같은 길인데도 보이는 풍경이 달랐다. 평소엔 눈길도 주지 않던 벤치가 새삼 눈에 들어왔고, 나무들의 모습도 달라 보였다. 큰 나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작은 나무 한 그루, 그 모습도 새로웠다. 저렇게 예쁜 나무가 있었나 싶었다. 평소 무심히 지나치던 골목길도 다르게 보였고, 집집마다 걸린 겨울 장식도 새로웠다. 단지 방향을 바꿨을 뿐인데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

우리는 익숙한 것만 보며,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살아가는 건 아닐까? 그래서 때때로 관성을 깨고 동선을 바꾸어야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닐까? 이제부터는 조금씩 방향을 틀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도착할지도 모르니까.

아이는 아침에 빵을 사러 나갔다. 오늘은 매장이 열렸을 것 같다며 나가더니, 맛있어 보이는 바게트를 한 손에 들고 돌아왔다. 아침으로 빵을 먹겠다며 바게트를 사 와 놓고선 갑자기 파스타가 먹고 싶다며 아보카도 크림 파스타를 만들겠다고 했다. 무엇이든 아침은 아이의 당번이니 나는 만들어 주는 대로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파스타는 지금껏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었다. 정말 최고라고 말했더니, 아이는 "엄마는 뭐든 그렇게 말하잖아요 “라며 웃었다.

아침에 나갔다 온 아이는 "오늘 너무 추워서 어디 나가기는 싫다"며 집에 있자고 했다. 굳이 안될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따뜻한 집 안에서 올해 마라톤 대회 일정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아이가 작년에 참가했던 ‘한강 나이트워크’ 이야기가 나왔다. 밤부터 아침까지 무박 2일간 한강의 야경을 바라보며 걷는 밤샘 한강일주 걷기 대회다. 아이는 한강공원에서 밤새도록 달리고 걷던 그 순간들이 무척 즐거웠다고 했다. 갑자기 나도 그 기분을 느끼고 싶어 졌고, 올해는 함께 참가하자는 말에 아이는 주저 없이 "좋아요!"라고 대답했다.


당장 검색해 보니 블라인드 티켓은 이미 마감되었고, 2025년 7월 25일에 행사가 열린다고 했다. 코스는 15K, 22K, 42K, 세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밤 9시부터 다음 날 아침 9시까지 이어지는 이 긴 걷기 대회에서, 우리는 또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끝없이 걷다 보면, 마침내 다다를 마지막 지점에서는 어떤 기분이 들까?


올해의 계획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무엇이든 함께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아이가 고마웠다.

오늘의 ‘굳이 프로젝트’ 미션은 ‘누군가에게 따뜻한 표현하기’였다.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을 망설이지 않고 해 보기. 그리고 힘들어 보이는 사람에게 "괜찮아?"라고 말 건네보기. 이 간단한 말들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말들이라는 걸 우리는 종종 잊고 산다. 정작 그 말을 해야 할 순간에는 아끼고, 떠나간 후에야 후회하곤 한다. 그러니 앞으로는 더 자주, 더 많이 말해야겠다.

날마다 맛있는 요리를 해주는 아이가 고맙고, 나와 함께 있어 주어 고맙다. 그리고 매일 전화를 걸어 내 안부를 묻고, 불편한 것은 없는지 세심히 살펴주는 유니님도 고맙다.

그리고 나에게도 ”괜찮아? “라고 말을 건네 보았다.


오늘도 나는,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리고 나에게 따뜻한 말을 건넬 수 있기를.
그 말 한마디가 하루를 환하게 밝힐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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