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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일 휴일 일기

L군을 기리며, 그에 대한 추억을 기록하다

by 낯선여름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은 소식도 잘 알기 어렵고, 그 삶이 회고도 없이 잊혀지는 것이 아쉽다.

늘 생각만 했지, 기록할 생각을 못했는데, 과 동기의 이른 죽음 앞에, 그를 내 방식으로 기록하면서 기리면서 작별 인사를 건네고 싶다.


L을 떠올리면 우리 과 최고 퀸카, 영국에서 온 프린세스 H의 남자친구라는 수식어가 바로 따라온다. 1학년 봄부터 4학년때까지 그렇게 그 둘은 모든 시간표를 똑같이 짜서 다녔고, 그는 군대도 미뤘고, 외국에 살고 싶다는 H를 위해 4학년부터는 외시 공부를 했었다.


그 친구가 그런 여정을 보내는 동안 나도 여러 이유로 과 활동을 안 하고 다른 과 사람들과 하는 동아리 활동에 더 시간을 많이 보내며 과 사람들과 멀어져 갔다. 나대로 연애와 삽질로 바빠졌던 탓도 있고, 그 사이에 남자 동기들은 군대를 갔다는 이야기를 간간히 들었다.


나에게 남아있는 L의 모습은 그래서 대학 신입생인 1996년 무렵의 모습이 거의 전부인데,

신기하게도 그 시절의 그가 눈에 선하다.


1. 교양국어 첫 번째 시간


L을 떠올리면 나는 교양국어 첫 번째 과제 발표 시간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우리는 첫 과제로 조한혜정 님의 ‘글 읽기와 삶 읽기 1’를 읽고 자신의 글을 써서 냈는데,

과제 제출 후 강사가 3명을 뽑아와 발표를 시켰다.

한 명은 동기중 최고령인 관록의 ㅇㅇ형, 철학서를 원전으로 다 읽고 온 듯한 ㅁㅁ, 마지막이 L이었다.

세 글 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사람이 쓸 수 없는 경지였다. 중고등학교 때 글쓰기 상 좀 탔다고 글 좀 쓴다고 생각했는데, 이 시간이 굉장히 큰 충격으로 다가올 정도로 멋진 글들이었다.

L의 글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글이었나, 무슨 글인지는 생각이 안 나는데, 그 친구 특유의 다정함과 성숙함이 담겨 있으면서도 수준 높은 글이어서 나는 그때부터 이 친구에게 약간의 경외감을 갖게 되었다. 저런 친구가 글을 쓰는 건가보다, 싶었다.


그래서 외시를 준비한다고 했을 때와

한참 뒤 대치동 국어 강사가 되었다는 소식에

나 혼자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2. 다정한 오빠 같은 동기


우리 과 우리 학번은 특이하게 나이 순 학번이어서 몇 번까지 삼수, 재수, 현역인지가 구분이 되었는데, L은 재수생으로 비교적 앞 번호였다.

게다가 같은 고등학교 출신의 현역 여자 동기 두 명이 L을 오빠라 불러서 뭔가 더 어른 같았다.

당시의 내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여자 동기가 재수를 했던 M였고, M과 L이 꽤 친해서 나도 덩달아 친하게 어울렸던 신입생 시절이었다. 둘이 모종의 썸을 타고 있었던 것도 같은데, 셋이 종종 차 마시며 어울리면 늘 그들이 나를 귀여운 동생으로 쳐다보던 기억이 있다. 나에게 “빨간 머리 앤”이라는 호칭을 쓴 오빠 같은 동기.


3. 편지


우연히 지난주에 파일들을 정리하다 대학교 1-2학년 때의 편지함을 잠깐 열었다. 비교적 앞쪽에 그가 보낸 편지가 꽂혀 있었다.

읽어보니, M에게 4장이나 되는 편지를 보낸 것을 내가 놀렸던 모양이고, 그것 때문에 의무감에 보낸 것 같지만, 참으로 다정한 편지였다.

그 편지 덕에 잠시 스무 살의 L과 우리들을 생각했던 것이 바로 지난주였는데.


동창회도 안 나가는 내가 L과 만날 일이 있었을까. 솔직히 둘 다 일부러 연락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번의 사고가 아니었다면 누군가의 경조사에서 한번쯤은 마주쳤으려나.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렇게 우연히 마주쳤을 때, 누구보다 반갑게 인사를 건넸을 친구라는 것.


L을 생각하면서, L의 따뜻하고 다정한 모습을 기억해 본다. 그때의 모습은 그때대로 두고, 이번에 처음 뵙게 된 아내분과 L을 똑 닮은 딸과 아들을 본다. 마냥 약해 보이지 않아서, 반듯해 보여서 마음이 조금 놓였다. 왕복 5시간 운전을 하고 집에 와서 뻗어버렸지만, 역시 다녀오길 잘했다 싶다.


L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을 수 없겠지만, 이렇게 대신한다.

스무 살 무렵 한 때를 함께 했던 친구야, 그때 참 고마웠어.

이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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