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걱정이 없어 차와 집 문을 잠그지 않는 나라. 밤에 혼자 걸어도 안전한 나라.
여자 혼자 여행하기 적합한 나라.
-Guide to faroe islands에서 발췌
차와 집 문을 잠그지 않는 나라. 범죄율이 0%에 가까운 나라. 페로 제도의 치안을 설명할 때 나오는 단골 멘트다. 필자도 3번을 방문했지만 소매치기나 강도는 단 한 번도 걱정하지 않았고, 실제로 그랬다. 밤에 여자 혼자 다녀도 괜찮다고 생각이 들 정도니까. 사람보다는 차라리 비와 바람이 더 직접적 위협이기에 '페로의 치안은 우수하다.'는 말에 매우 동의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어떨까?라는 궁금증이 들어 페로의 범죄율 통계를 찾기 시작했는데 적어도 내가 찾아본 한국어 자료에는 다룬 글이 없었다. 그래서 직접 쓰기로 했다. 이 글이 우리나라에서 페로의 범죄 통계 정보를 가장 자세하게 전달하기를 희망하며!
결론적으로 수치로 따질 때 범죄율이 0%에 가깝다는 말은 틀린 정보다. 범죄율=인구 10만 명 당 범죄 건수니까, 인구가 약 5만 명인 페로의 총 범죄 건수에 2를 곱하면 10만 명 당 범죄율이 나온다.
2023년 페로의 총 범죄 건수: 734건의 보고된 사건(Reported crime)
2023년 페로의 범죄율: 약 1,468건 (734*2)
2023년 한국의 범죄율: 2,961건
치안 강국인 한국보다 범죄율이 낮지만, 마냥 안심할 수준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오류가 있다.
페로는 모든 불만, 전화, 신고, 심지어 귀찮은 전화까지 통계에 등록합니다. 심지어 경찰이 불법이 아니라고 여기거나 조사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여기는 전화, 체포, 벌금 또는 법적 소송으로 이어지지 않는 전화도 포함됩니다.
레딧의 한 페로 제도 유저가 남긴 댓글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734건이라는 수치에 범죄가 아닌 것도 포함됐다는 소리다. 하지만 댓글만 믿을 순 없지. 이 내용을 페로 통계청에 메일로 보내 집계 기준을 문의했다.
통계청에서 온 답변은 '맞다, 보고된 범죄 건수다.'라고 한다.
한국의 국가발전지표는 범죄율을 '인구 10만 명당 형법범죄 발생건수이며, 형법범죄는 현행 형법 위반 사건을 말함.'으로 정의한다. 즉, 실제 발생했다는 소리다. 하지만 페로 제도는 '신고된 건수'를 포함한 통계를 내기에 범죄율을 1:1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까지는 통계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734건이 발생했다 전제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보자.
아래는 페로의 법 조항이며 범죄에 관한 법률의 대표적 내용을 가져왔다. 모든 하위 조항이 아닌 내용의 일부만 가져왔음을 미리 밝힌다.
제24장 216조
강간에 해당하는 경우 최대 8년의 징역형에 처함. 이는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관계를 가진 경우를 의미함. 동의는 말이나 행동으로 명확히 표현되어야 하며,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속에서 확인될 수 있어야 함.
276조
타인의 동의 없이 이동 가능한 물건을 가져가고, 이를 자신이나 타인의 부당한 이익을 위해 사용한 자는 처벌받음. 이동 가능한 물건에는 전기·열·동력 등 경제적 목적을 위한 에너지도 포함됨.
291조
타인의 소유물을 파괴, 손상하거나 폐기한 경우 벌금형 또는 최대 1년 6개월의 징역형에 처함.
제25장 244조
폭력을 행사하거나 그 외의 방법으로 타인의 신체를 침해한 경우 벌금형 또는 최대 3년의 징역형에 처함.
제28장 249조
과실로 인해 타인의 신체나 건강에 중대한 피해를 준 경우 벌금형 또는 최대 4개월의 징역형에 처함. 특별히 가중 처벌할 사유가 있는 경우 최대 8년까지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음. 음주운전, 교통법 §15(1,2) 조항 위반, 극히 무모한 운전으로 인한 경우 가중 처벌됨.
제27장 263조
1항) 다음 행위를 한 경우 벌금형 또는 최대 6개월의 징역형에 처함.
-타인의 편지, 전보, 기타 봉인된 문서를 무단으로 개봉하거나 이를 보유하고, 그 내용을 확인하는 행위.
-타인의 보관소에 무단으로 접근하는 행위.
-도청 장치를 사용해 타인의 대화(전화, 회의 등)를 몰래 듣거나 녹음하는 행위.
2항) 타인의 데이터 또는 소프트웨어를 무단으로 획득한 경우 벌금형 또는 최대 1년 6개월의 징역형에 처함.
276조
타인의 동의 없이 이동 가능한 물건을 가져가고, 이를 자신이나 타인의 부당한 이익을 위해 사용한 자는 처벌받음. 이동 가능한 물건에는 전기·열·동력 등 경제적 목적을 위한 에너지도 포함됨.
제14장 119조
공무원이 직무 수행 중 폭력·협박을 당하거나, 이를 통해 공무를 방해하려 한 경우, 또는 공무원에게 불법적으로 특정 행위를 강요하려 한 경우, 벌금형 또는 최대 8년의 징역형에 처함. 공공장소에서 심각한 소요 사태가 발생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경우, 가중 처벌됨.
293조
타인의 소유물을 부당하게 사용하는 경우, 최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형에 처함. 단, 해당 행위가 § 293a 조항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에 한함.
제20장 182조
부주의로 타인의 재산에 화재를 발생시킨 경우 벌금형 또는 최대 2년의 징역형에 처함.
제19장 171조
법적 관계에서 위조된 문서를 사용하여 사기 행위를 한 경우, 문서 위조죄로 처벌받음.
제16장 150조
공무원이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타인에게 특정 행동을 강요하거나 금지한 경우, 최대 3년의 징역형에 처함.
제17장 158조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한 경우(원격 증언 포함), 최대 4년의 징역형에 처함. 이 규정은 외국 법정에서도 적용됨.
제18장 170조
법적 근거 없이 채권을 발행하거나 유통한 경우, 벌금형 또는 최대 3개월의 징역형에 처함. 단, 외국 화폐는 예외로 함.
그렇다면 우리가 해외여행을 갔을 때 만날 가능성이 높은 범죄는 무엇일까? 성범죄, 절도, 폭력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 3개 항목의 합계는 405건이다. 단순 계산으로 나라 전체에서 3개를 합한 사건이 하루 1.1건 발생하는 거다. 물론, 이는 단순 신고까지 포함된 수치다. 그러니까 나라 전체에서 하루 1건 일어나는 사건에 내가 휘말릴 확률과, 외국인을 상대로 한 범죄가 뉴스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행자가 실제 범죄를 당할 확률이 없진 않아도 매우, 상당히 낮다고 말할 수 있겠다.
현실적으로는 폭행(시비), 음주운전, 과속을 조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다. 폭행이야 어딜 가든 시비가 걸릴 수 있으니 기본으로 깔고 들어간다. 필자는 페로의 뉴스를 번역해 업로드하는 콘텐츠를 만드는데, 페로 뉴스에는 음주운전과 과속 관련 뉴스 기사가 종종 올라오곤 한다.
렌터카 여행자가 많은 페로의 특성상 운전할 일이 많기 때문에 음주나 과속으로 인한 사고를 조심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물론 이것도 밤늦게 다닐 일이 별로 없으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과속 적발 기사가 메인에 걸릴 정도로 큰 사건사고가 없는 곳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통계적으로 봐도, 경험적으로 봐도 페로 제도는 해외 여행지 중 상당히 안전한 편에 속한다. 그럼 페로 제도는 왜 이런 특성을 띄게 됐을까? 페로 제도의 낮은 범죄율에 기여한 특성을 알아보자.
1) 폐쇄된 환경
페로 제도는 섬이다. 그것도 지도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확대해야만 간신히 보일만큼 작은 섬이며 면적은 제주도와 비슷하다. 대서양 한가운데 놓인 작은 섬이라 범죄자가 들어오기도 어렵고, 또 도주하기도 어렵다.
2) 적은 인구
페로 통계청에 따르면 2024년 페로 제도의 인구는 54,675명이다. 마을 단위로 모여 사는 경우가 많아 서로를 모르기 어렵다.
3) 공동체 의식
이처럼 폐쇄된 공간에 적은 인구가 살다 보니 지역 사회의 유대감이 깊어지고, 공동의 책임감이 형성돼 범죄를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4) 높은 경제 수준
2023년 기준 페로의 1인당 gdp는 7만 달러로 한국의 2배 이상이다. 게다가 2022년 자료에 따르면 지니 계수(0에 가까울수록 좋음) 또한 0.22로 선진국으로 꼽히는 덴마크(0.28), 그린란드(0.35), 노르웨이(0.27)보다도 낮은 편이다.
지금까지 페로 제도의 치안을 자세하게 알아봤다. 분명 조심해야 할 부분은 있지만, 체감상으로는 지금까지 가본 여타 여행지 중 독보적 치안을 자랑하는 곳임이 틀림없다. 이 글이 페로 여행을 준비하는 여행자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길 바라고, 가지 않더라도 읽는 동안만큼은 흥미로운 시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글을 적었다. 시간 내어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주신 모든 분을 위해, 페로 제도를 선물하며 글을 마칩니다.
페로 제도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airspace2010/14
페로 제도 여행에 관심이 있다면? https://open.kakao.com/o/gtG1qYhh
한국 범죄 출처: https://www.index.go.kr/unify/idx-info.do?idxCd=4262
페로 범죄 출처: https://statbank.hagstova.fo/pxweb/en/H2/H2__RL__RL02/logr_brot.p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