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와도 괜찮아요?
훼손되지 않고, 탐험되지 않고, 믿을 수 없는 곳
-여행지 평가에 참여한 전문가 코멘트
2014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주도 하 522명의 전문가가 전 세계의 111개 섬 여행지 순위를 평가했어요. 페로 제도가 87점을 얻어 노르웨이의 로포텐, 아이슬란드, 도미니카, 팔라완 등 유명 여행지를 제치고 1위로 선정됐고요. 이처럼 페로 아름다운 곳이 분명하지만...
일정 내내 비가 오면 어떨까요?
복잡한 대중교통 시간표를 숙지해야 한다면요?
페로는 과연 나한테도 좋은 여행지일까요?
저는 파리를 정말 싫어했어요. 누군가에겐 낭만일 파리 감성이 저에게는 맞지 않았거든요. 최근 페로에 대한 정보글을 글을 쓰고 있는데, '내 글을 보고 덜컥 페로로 가시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페로의 특징을 반영해 여러분이 진짜 여길 좋아하게 될지 가늠할 항목을 만들어봤는데, 절대적 기준은 아니니 가볍게 참고해 주세요.
페로의 주 콘텐츠는 '자연' 그 자체예요. 트레킹이 액티비티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보트 투어 같은 상품도 결국 자연을 보기 위함이에요. 도시는 작고 아기자기한 편인데, 그마저도 자연 속에 묻혀있는 경우가 대다수예요. 넓은 들판, 바람, 봉우리, 양, 자연친화적으로 지어진 집을 사랑하는 분께 훨씬 유리하죠. 만약 자연과 걷기가 너무 싫은 게 아니라면, 한 번쯤 경험해 봐도 좋을 거예요. (단점은 여길 한 번 보면 아이슬란드정도는 되어야 성에 찬다는 거?)
[많이 중요한 것: 아래 내용과 안 맞을 경우, 페로 여행에 불만족할 가능성이 높음]
1. 비가 오면 긍정적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여행자
페로의 날씨는 변화무쌍하고, 일기예보도 실시간으로 바뀌어요. 이건 제 여행 직전의 일기예보인데, 15~24일까지 예보가 좋았어요. (이 정도면 페로에서는 진짜 좋은 거예요.) 그런데 막상 가니 거의 2주 내내 비가 왔어요. 비가 너무 강해 아무것도 못 한 날도 있고, 비를 맞으며 트레킹을 하다 보니 잠시나마 날이 갠 적도 있어요. 또, 분명 예보는 적당히 맑음인데 비가 올 때도 있었고요. 여행을 간다면 높은 확률로 이런 상황을 마주 할 테니, '비 와서 아무것도 못 하겠네.'보다는, '비가 오는데 뭘 하면 기억에 남는 하루가 될까?'라는 마음가짐이 필요할 거예요. (필자는 반 정도 실패했습니다...)
이건 제가 비 올 때 한 것이에요.
-구석구석 드라이브하기 (강추)
-동네 카페 가서 멍하니 앉아있기
-기념품샵 돌아다니기
-아무렇지 않은 척 비 맞고 돌아다녀보기 (약간의 정신승리)
2. 계획이 바뀌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여행자
저는 ENFJ예요. 1시간 단위로 방문할 장소와 동선을 짜놓고 다니는데 페로에서는 거의 무용지물이에요. 날씨 때문에 미키네스 페리가 취소되거나 아예 트레킹을 하기 어려우면 플랜 B를 짜도 소용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변수가 생기면 유연하게 일정을 바꿀 준비가 돼있어야 해요.
3. 최소 5일 이상의 일정이 있는 여행자
페로제도의 면적은 강원도 평창군과 비슷하고, 제주도의 70% 수준이에요. 제 경험상
-남부의 샌도이(Sandoy)와 수에우로이(Suðuroy) 섬 제외
-차 렌트
-6~8월 기준
-맑음 or 흐림 or 옅은 비 수준의 날씨
-하루 3~4곳 트레킹/방문
이라는 전제 하에 꽉 찬 3.5일이면 페로의 메인 스팟을 전부 볼 수 있어요. (근데 정말 힘들 거예요.) 그 정도로 작은 곳인데, 문제는 날씨예요. 최악의 경우 모든 일정에 안개와 비가 있다고 생각해야 하죠. 한 번 가기도 힘든데 타이트한 일정과 변화하는 날씨로 아무것도 못 하고 아쉬움만 남길 수도 있어요. 그래서 최소 5일 이상의 여유가 있는 분께 추천해요. 제가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여행자의 평균 일정은 체감상 6~7일 정도였어요. 10일 이상 머무는 여행자를 찾기 어렵더라고요.
[조금 중요한 것: 아래 내용과 안 맞아도, 페로 여행이 만족스러울 수 있음]
1. 트레킹 코스에 양의 끙이 있어도 크게 신경 안 쓰이는 여행자
하지만 피하기 어렵진 않아요.
잘 안 보이겠지만, 사실 저곳은 양의 끙밭이에요. 못 걸을 정도는 아니지만, 주의가 필요한 수준이죠. 물라포수르나 트래라니판같은 대표 스팟은 깨끗하지만,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트레킹을 할 때 풍경보단 바닥을 보고 걷는 빈도가 높아질 거예요. 다행인 건 또 그렇게 온 사방이 끙밭은 아니라는 거. 나름 피할만해요. 만약 이게 너무 신경 쓰여도, 트레킹 하면서 보는 풍경이 이런 수고를 어느 정도는 잊게 해 줄 거예요. (필자는 있는 힘을 다해 바닥을 피해 다녔습니다... 하지만 만족도는 최상! 뷰는 카메라로 보자)
2. 평지나 약간의 경사를 하루 4~5시간 걸을 체력이 있는 여행자
하지만 하루 1~2시간만 걸어도 충분해요.
페로 유명 스팟 기준으로 트레킹은 짧으면 1~2시간, 길면 3~4시간이 걸려요. 페로 일정이 보통은 짧다 보니 n개의 트레킹 코스나 스팟을 묶어서 하면 하루 약 3~4시간 정도를 걷는 셈이죠. 만약 5일 미만의 짧은 일정이라면 6~7시간도 생각해야 할 거고요. 그래서 기초적 체력이 있어야 페로를 즐기기 좋을 거예요. 다행히 대표 트레킹 스팟은 평지 거나 경사가 낮고 계단이 없어 쉬엄쉬엄 걷기 좋아요. 또, 하루 한 곳만 가도 충분하니 체력이 약하다고 배제하진 마세요. 페로의 강하고 시원한 바람이 당신을 밀어주고, 기분을 좋게 해 줄 테니까요.
3. 렌트하거나, 대중교통 시간표를 읽는 법에 익숙한 여행자
하지만 유명 스팟만 방문하면 이동이 어렵지 않아요.
차를 렌트했다면 이동은 쉽겠으나 렌트비가 부담될 거예요. 성수기 기준 현대 투싼 6일에 110만 원, 닛산 니로 21일에 370만 원 정도 했거든요. 이것도 업체 중 제일 싼 곳을 고른 거고요. 게다가 주유/터널비는 미포함이라 +20~40만 원가량 생각해야 해요.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1. 메인 도시를 제외하면 배차 자체가 적을 수 있음
2. 시즌/요일/공휴일마다 운행하는 시간, 정차역이 다름
이라는 거예요. 제 경우는 '차를 놓치지 않을까? 놓치면 어떻게 돌아오지?', '시간표를 제대로 읽은 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어 불안하더라고요. '스케줄표 그냥 보이는 대로 읽으면 되는 거 아니야?' 싶겠지만...
페로의 대중교통 시간표는 직관적이지 않아요. 이 시간표를 읽으려면 아래 내용을 이해해야 하는데요. (다 읽어보실 필요는 없어요.)
초록색 네모: 24. 8. 13~25. 6. 18 중 운행
주황색 네모: 400번 버스
S) Gotudali에서 버스 환승
T) 출발 전날 21시 전까지 23 44 28로 전화가 온 경우 운행
1) 고등학교를 통하는 Kambsdal은 운행하지 않음
2) Syðrugøta에 멈추고 Gøtudalur는 가지 않음
x=평일
6=토
7=일
영어를 잘 못하고 걱정이 많은 제게 이런 시간표는 상당한 불안요소라 개인적으로 페로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 크게 추천하지 않아요.
렌트도 안 할 거고 시간표 읽기도 자신이 없다면
-보가르 섬(물라포수르, 트래라니판)
-미키네스 섬
-스트뢰뫼 섬(토르스하운)
-놀소이 섬
-보르도이 섬(클락스비크)
-칼소이 섬(칼루르)
을 목적지로 정해 보세요. 유명 도시고 버스/페리가 자주 다녀서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 해요. 다행히 위에 언급한 장소가 페로의 유명 관광지 중 80% 정도를 차지하니 저곳만 방문해도 만족스러운 여행을 할 수 있을 거예요.
또, 페로의 치안은 굉장히 좋은 편이라 여자 혼자 밤늦게 돌아다녀도 될 수준인데요. 예로, 1967년 이래로 살인 사건은 10건이었어요.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하기 어려운 히치하이킹도 적극적으로 고려할 만한 옵션이에요.
*페로의 치안에 대한 상세 내용은 https://brunch.co.kr/@airspace2010/14의 1-4) 치안 부분을 확인해 보세요.
4. 음식을 조금 할 줄 아는 여행자
하지만 주유소 편의점 같은 곳에서도 해결할 수 있어요.
이 내용은 돈을 아끼고 싶은 여행자에게만 해당하는데요. 페로의 물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비싸요. 지출을 줄이려면 에어비앤비를 잡고 음식을 해 먹는 게 최선이라, 요리... 아니, 음식을 조금이라도 할 줄 알면 좋아요. 하지만 주유소 편의점에서 한 끼에 만 원 내외로 파니니 같은 간단한 음식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마지막으로
이 항목을 넣을지 말지 많은 고민을 했는데요. (조금 지난 얘기지만)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서비스/제품의 소비 여부를 정하는 성향이 아직은 남아있는 것 같아요. 그 관점에서 페로 제도는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돌고래를 사냥하는 나라이기도해요. 개인적 가치판단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런 이슈에 관심이 많으신 분께 도움이 될까 해서 적어봐요.
지금까지 어떤 성향의 사람이 페로 제도에 가면 좋을지를 간단하게 적어봤어요. 페로를 알게 되신 분께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페로 제도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airspace20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