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얼마 전 쿼라(Quora)에 개발자라면 흥미로울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아마도 본인의 미래를 걱정하는 젊은 개발자인 것같군요.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나이가 들어도, 가령 60대가 되어도, 계속 일을 할 수 있나요? 소프트웨어 개발은 항상 최신 기술이나 프레임웍을 배워야 하는데, 나이가 들면 습득력이 떨어지지 않나요?"
이 질문에 '나이가 든다고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건 아냐!' 하며 발끈하는 듯, 고령의 개발자들이 답글을 주르륵 달았습니다. 그중에 IT컨설턴트로 보이는 한 백전노장의 답변이 눈길을 끕니다.
"수십 년 동안 코딩을 해 온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젊은 개발자보다 새로운 언어와 프레임워크를 더 빨리 습득합니다. 왜냐고요? 여기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커리어 내내 그렇게 해왔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기술을 연마했습니다. 둘째,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별로 없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기술 및 프레임워크'의 대부분은 단순히 기존 기술의 변형일 뿐이죠. 셋째. 우리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및 개발에 대한 보다 광범위하고 심층적인 지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경력이 '결코 고스톱 쳐서 딴것이 아니다'라는 듯한 대답입니다. IT업계의 기술주기가 빠르다고는 해도, 우리는 업계에서 일하면서 필요한 지식을 학습하는데 이미 많은 훈련이 되어있다. 이 경험을 통해 주니어들보다 빨리 습득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넘쳐나는 정보들 중 중요한 것을 골라보는 안목이 생겨, 필요한 지식만 취사선택할 수 있다고도 하는군요. 맞는 말입니다. 한 가지 컴퓨터 언어를 정복하면(가령 C/C++) 다른 언어(예. 자바, C# 등등)를 비교적 손쉽게 배울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면서, 자신의 서재에 빽빽이 꽂힌 전공서적을 찍은 사진을 첨부합니다. 사진만 봐도 이분이 개발자로 어떤 세월을 보내셨는지 알 것 같지 않나요?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몇 가지 바라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보다 나은 업무환경, 가족과의 시간, 워라벨 등등 여러가지였습니다만, 그중 하나는 미국에서는 '건강이 허락하는 나이까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였습니다. 한국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정보로는 '미국 회사에는 흰머리 할아버지 개발자들도 있다. 나이 때문에 회사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다'라고 했으니까요. 적어도 타의에 의해 개발자를 은퇴해 통닭집을 열어야 하는 운명은 피하고 싶었으니 말이죠.
그런데, 미국 회사에 입사한 지 4년 정도 된 지금, 생각해보면 그다지 나이 지긋하신 분들을 많이 뵙지는 못한 것 같군요. 다들 골방에 숨어서 코딩하고 계신지. 백발 미남들은 다 어디 계신가요. 상대적으로 오래된 반도체 회사인 저희 회사 사정도 이런데,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젊은 회사들은 주니어 인력이 훨씬 많겠지요. 듣기로는 시니어가 되면 이미 집에 충분한 돈을 쌓아 놓았기 때문에 조기 은퇴하셨거나, 프리랜서나 독립 계약자(individual contractor)로 근무하는 형태가 많아 회사에서 매일 얼굴을 보기 힘들다는군요.
그래서, 가끔씩 개발자로 생명력을 이어가시는 시니어 분들을 만나면, 저절로 리스펙이 생깁니다. 그분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 위 사진에 보이는 책장을 채워나가신 분들이니까요. 연차만 쌓인다고 빠른 학습능력이 절로 생기는 것이 아닐 것이며, 그 기간 동안 보이지 않는 많은 노력을 쏟았을 테지요. 비록 이분들이 회사에서 한해 수십에서 수백만 달러를 집행할 권한이 있는 고위직 임원이 아니어도, 업계에서 살아온 삶의 궤적에는 그에 못지않는 매길 수 없는 가치(invaluable)를 담고 있을 겁니다.
일찍 은퇴하고픈 생각이 없는 저도, 오늘은 책 한 줄 더 읽어야겠습니다.
- 예나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