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나빠 Sep 26. 2021

실리콘 밸리의 봉이 김선달

'과유불급'의 뜻이 위대하게 들리는 순간


엘리자베스 홈즈. 4년 전 실리콘 밸리로 이주한 후 매체를 통해 우연히 그녀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어느 용감한 기자에 의해 그녀의 거짓 행각이 이미 폭로된 뒤였죠. 그녀는 당시 실리콘 밸리의 허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쁜 예'로 가끔씩 언급되기만 할 뿐 거의 잊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그녀가 다시 매체를 달구고 있습니다. 연방 검찰에 의해 사기죄로 기소되어 본격적으로 재판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명문 스탠퍼드 재학 중 '피 한 방울로 200여 가지 질병 테스트가 가능한 진단 방법'이라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2014년 스타트업을 창업, 단숨에 실리콘 밸리의 기린아로 떠올랐습니다. 정재계에 걸친 부모의 인맥, 스탠퍼드 출신, 젊은 백인 여성, 화려한 언변을 무기로 많은 VC로부터 투자를 받아냈고, 각종 언론을 포함한 미국 전역의 눈을 멀게 만들었죠. 실리콘 밸리는 그녀를 칭송하기에 바빴습니다.


하지만 신기루 같은 그녀의 아성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피 몇 방울로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생명공학계나 의학계에서 지속적으로 의구심을 표했습니다. 회사는 그 의구심을 불식시킬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홍보하던 진단 기술에 대한 실험 결과, 논문 한편 공개하지 않았죠. 


결국 WSJ의 탐사보도에 의해 내부 실체가 드러났고, 그녀가 그동안 거짓으로 쌓아 올린 명성은 일시에 붕괴됩니다. 한때 90억 불에 달하던 기업가치는 하루아침에 0이 되었고, 그녀의 회사는 주식시장에서 영구 퇴출되었습니다. 투자자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그녀는 결국 연방대배심에 의해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기에 이릅니다.


코로나로 지지부진하던 그녀의 재판이 최근 다시 재개되면서, 매체들이 그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동업자인 남자 친구가 시켰다", "실리콘 밸리엔 실패한 경영자들도 많은데, 왜 나만 문제가 되는가?"라는 온갖 논리를 펴가며 자신을 방어하고 있다고 합니다. 최근 그녀가 135백만 불(한화 1500억 원) 짜리 호화 주택에 살고 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대중의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태가 이지경이면 언론은 그녀를 마녀 사냥하듯 깎아내리기 바쁠 텐데, 의외로 최근 미국 매체는 이 재판에 대해 꽤 건조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한 투자자나 전 직원들의 증언을 전달하고, 객관적으로 논평 중이죠. 그녀의 주장에 대해서도 일방적으로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녀의 말대로 단순히 '실패'만으로 유죄판결을 내릴 수 없고, 그녀가 투자자들을 기만한 사실에 '고의성'이 있었는지가 핵심일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실리콘 밸리는 그녀의 사례를 통해 그동안 이곳에 만연했던 '성공 신화'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로 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실리콘 밸리에서 열정과 기술만으로 단숨에 부를 거머쥔 전설적인 인물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투자, 실패 용인, 인재 수급 등 상대적으로 좋은 생태계를 갖고 있어 창업가들에게 천국과도 같은 곳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12개 중 1개의 스타트업만 생존을 보장하는 정글과도 같은 곳이기도 하죠.


이곳에서 근무하다 보면 "아는 사람이 운영하던 스타트업이 대기업에 팔려서 백만장자가 되었다네!", "이번에 퇴사한 A 있잖아? 그 친구 부인이 스타트업으로 대박 나서, A가 그냥 은퇴해버린 거래!"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듣습니다. '사촌이 땅을 산 것'같은 소식들을 자주 접할 수밖에 없는 곳이지만, 12개 중 11개의 회사가 문을 닫은 실패담은 우리의 귀에까지 들려오지 않죠. 


'부'를 향한 인간의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전 세계에서 실리콘 밸리에 몰려든 모든 이들에게 이러한 욕심을 빼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요. 오늘도 많은 이들이 그 욕망을 엔진 삼아 앞을 보고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리하게 속도를 높이려 그 엔진에 '거짓과 허구'라는 기름을 부어대다가 전복하거나 불타버리고 말겠죠. 


엘리자베스 홈즈가 테라노스를 창업했을 때, 전 세계인들의 혈액 검사를 혁신적으로 바꾸겠다는 '선한 의도'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를 실리콘 밸리의 '봉이 김선달'로 만든 것은, 바로 스스로를 노예로 만들어버린 탐욕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다스려지기 힘든가 봅니다. 케케묵은 사자성어 '과유불급'의 뜻이 위대하게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예나빠.



표지 이미지: 영화 <봉이 김선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