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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빠 May 26. 2022

벗을 기다리며

마음으로 수백번 내밀었던 손길


미국에 온 뒤 한국에 있는 후배나 전 직장의 동료들로부터 가끔씩 메일을 받곤 한다. 대부분 평소 자주 연락을 하던 사이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용기를 낸 이유는 바로 미국 이직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경험자인 내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추천을 부탁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경험담을 자세히 알려주거나 필요하면 회사 사이트에 그들의 이력서를 올려주곤 한다.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도 않고 무엇보다 그들이 어떤 심정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자녀 교육, 진로, 경력 아니면 단순한 선망, 어떤 이유든 그들은 한국을 떠나고 싶게 되었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막막한 상태에서 인터넷을 헤맸을 것이다. 그렇게 인연의 끈을 쫓다가 나에게까지 다다르게 된 것이다.


미국 이직, 아니 미국 이민 자체를 결심했다는 것은 그들많은 희생을 치를 각오를 이미 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희생의 크기가 얼만큼인지는  모른다.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 사랑하는 부모, 형제, 친구들을 떠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겪기 전까지   없다. 막연히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는 기대감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그들에게 고국을 떠나는 걱정보다 현실이 주는 고통의 무게가 훨씬 크다는 것이다.


같은 길을 먼저 걸어왔기에 그래서 누구보다 그들을 이해한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내 안의 그리움 때문이다. 타향살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정작 나였던 것 같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만의 시간이 좋았던 나는 한국에서 맺었던 인연을 무엇보다 가볍게 생각했다. 그래서 새로운 곳에 정착하는 것은 철저히 준비했지만 인간관계의 단절에 대해서는 그다지 대비를 하지 않았다. 물론 새로운 곳에서도 새로운 인연은 시작된다. 새로운 동료, 이웃, 친구. 하지만, 내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했던 관계와는 그 깊이부터가 다르다.


지긋지긋한 삶을 벗어나고자 택한 미국행이었지만 이제는 그때 그 시간이 그리워진다. 오후 다섯 시 반이면 사내식당에 우르르 몰려가던 기억, 테이크 아웃해온 저녁을 풀며 회의실에 모여 앉아 두런두런 떨던 그 수다가 생각난다. 조직개편 소문에 전전긍긍하고, 보너스 비율에 일희일비하며, 상사들에 대한 험담을 깨알같이 쏟아내던 동료들과의 그 시간이 말이다. 불안한 미래를 바라보는 같은 처지였기에, 숨김없이 속내를 털어낼 수 있었던 그 저녁시간이 그립다.


회식, 강요된 소속감, 경직된 조직문화가 싫었다. 조직의 이익이 앞세워질 때 개인의 욕망은 충돌하고 서로가 타인으로 변해갔다. 극심한 감정소모가 나를 지배할 때 바다너머 타국은 안식처처럼 다가왔다. 이민자의 나라, 모두가 이방인이기에 서로가 필요이상의 선을 넘지 않는다. 가족과의 유대만이 중요하고 직장은 생계의 수단, 그 이상의 의미가 없는 절제된 조직문화가 내게 완벽한 정서적 안정감을 주었다.


하지만, 어느날부터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무언가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쌓아왔던 끈끈한 동질감. 으르렁대면서 정든 옛 전우들에게서만 느낄 수 있던 감정이었다. 그것은 언어와 문화의 장벽 너머의 이들과는 절대로 공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짧은 인연이 어떤 이유로든 나에게 다시 연결될 때 그리움과 반가움이 교차하는 것이다. 그들이 도움을 요청하던 그 손길은 어쩌면 내가 마음으로 수십 번 내밀었던 그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출장 왔다며 옛 동료가 연락이라도 하면 만사 제쳐두고 달려가는지 모른다.


쇼생크 감옥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던 앤디에게는 수감생활 동안 절친이 된 레드가 있었다. 앤디가 20년을 준비해 탈옥한 끝에 완벽한 자유를 얻었지만 그의 삶이 완성된 것은 가석방된 레드와 해후를 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다린다. 나의 벗, 나의 레드와 만나는 순간을 말이다.



본 글은 월간 에세이 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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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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