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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빠 May 28. 2022

엔데믹이 가져오고 있는 풍광

그동안 두었던 사회적 거리에 다시 채워야 할 것


2년 전 외부에서 VP가 새로 영입된 뒤 사내 연구팀에 새바람이 불고 있다. 그는 신규 채용도 늘리고, 조직 인력들을 사내에서 더 수급하고, 대외 협력 기회도 넓히고, 연구 조직에 필요한 예산도 확충하는 등 연구원들을 위해 더 나은 환경을 만들고 있다. 


그런 그가 회사에 새롭게 도입한 것 중 하나가 연구조직 서밋(summit: 회담, 모임) 이벤트다. 한국으로 치면 일종의 웍샵 + 전시회 + 학회가 결합된 형태로 볼 수 있는데, 유럽, 미주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같은 조직의 연구원들을 한 자리에 모아 친목을 도모하고 서로의 연구 결과도 공유하며 회사의 미래를 논의하는 의미 있는 행사다. 


지난주에 바로 그 서밋이 개최되어 2박 3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회사에서 2시간가량 떨어진 해변 관광지의 어느 한 호텔에서 열렸는데, 그동안 온라인으로만 보아오던 팀원들, 새로 만나는 옆 팀의 팀원들, 사내의 주요한 관리자들을 한 자리에서 대면할 수 있었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2년 만에 직접 만난 터라 서로가 서로를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모두들 그동안 얼마나 대화에 굶주렸던 것인지, 쉬는 시간이면 음료 한잔씩 들고 여기저기서 그룹을 지어 수다를 떨어댔다. 연구 아이디어, 회사 이야기부터 가족이나 사적인 이야기 등으로 대화가 꼬리를 물고 끝나지 않았다. 발표나 포스터 시간이면 열띤 토론이 이어졌고, 그룹 토의 시간이면 너나 할 것 없이 연구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싸늘한 겨울과 같았던 코비드가 엔데믹(Endemic)으로 치달으며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봄의 싹을 틔우고 있는 것이다.




코비드가 원격 근무를 정착시킨 덕분에 직원들은 '회사'라는 물리적인 공간으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되었다. 새롭게 채용되는 해외 인력들은 더 이상 미국으로 이주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떤 이들은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해 물가가 비싼 캘리포니아를 떠나곤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전례 없이 새롭게 주어진 이런 '자유'가 사람을 더욱 고립시켜 정신적으로 더 구속하고 있다.


물론 상대적으로 타인보다 나를 더 중요시하는, 개인화가 보편적인 서구사회에서 이러한 시공간의 자유를 더욱 만끽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다. 다른 구성원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서로가 서로의 빈 곳을 채워가며 살아간다. 판데믹 기간 동안 어쩔 수 없이 둘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거리'에, 이제는 모두가 잃어버렸던 '유대감'이라는 감정을 그렇게 다시 조금씩 채워나가는 중이다.


실리콘 밸리의 기업들이 앞다투어 리오프닝을 시작하며 직원들이 하나둘씩 회사로 복귀하고 있다. 덕분에 출퇴근 시간이면 도로는 점차 (판데믹 이전처럼) 정체되기도 한다. 오랜만에 회사에서 출근했을 때 그들을 반기는 것은 새롭게 리모델링된 사무실이다. 판데믹 기간 동안 회사는 근무환경을 새롭게 재편했고, 전일 재택 또는 하이브리드 근무를 선택한 이들이 반납한 사무 공간을 모아 좀 더 효율적으로 꾸몄다. 전일 근무자들이 잘 사용할 수 있도록 공용 공간, 회의실을 늘리고, 휴게실을 더욱 친화적으로 조성했다. 회사가 가졌던 것은 돌아올 직원들이 이전보다 더 서로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2년 만에 회사에 출근했을 때 사무실은 여전히 텅 비다시피 했다. 회사 정문은 아직도 폐쇄된 채이며, 사내 카페는 제한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아직까지 출근이 의무 사항이 아니어서인지, 코비드가 완전 종식된 것이 아니어서인지, 대부분의 직원들은 아직까지도 재택근무 중이다. 2년 만에 찾은 내 자리에 들어서서, 오랫동안 주인을 기다려왔던 43인치 모니터에 생명을 불어넣고, 다시 만난 내 키보드의 타격감을 만끽하며 코딩을 하거나 메일을 써내려 갔다. 조용한 사무실에 울려 퍼지는 건 기계식 키보드 특유의 경쾌한 타건음. 그러다 간혹 다른 팀원이 출근하기라도 하면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다. 2년분의 그것을 한 번에 몰아서 하듯.


오랜만에 '퇴근'이란 것을 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아빠에게 반갑게 달려왔던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는 작은 행복감을 맛봤다. 판데믹 기간 동안 늘 붙어있어 잊고 있었던 것은 가족 간의 '유대감'이었다. 이는 강제된 '사회적 거리'가 아닌 현실로 복귀했을 때 갖는 '일상의 거리'에서 더 크게 다가온다. 학교에서 돌아와 집에서 하루 종일 아빠를 기다렸던 아이와, 퇴근길 운전 중인 차 안에서 아이와 아내를 떠올리는 아빠사이에 존재하는자연스러운 거리말이다.




서밋 마지막 날, 실리콘 밸리 지역에 거주 중인 팀원들은 먼저 행사장을 떠나게 되었다. 다시 유럽의 고국으로 돌아갈 팀원들은 호텔에서 1박을 더하고 다음날 공항으로 떠나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대면한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일 년 동안 차가운 모니터를 통해서여만 하기에 모두가 아쉬워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다지 아쉽지도 않았다. 2박 3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의 마음속 빈 구석을 한 조각씩 채워 주기 시작했고, 이제부터는 공간을 초월하면서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크게 메워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유대감. 그것이 엔데믹이 나에게 가져오고 있는 또 다른 풍광이다.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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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세에서 보내는 편지 - 실리콘 밸리에서 한국에 계신 분들에게 보내는 메세지

어쩌다 실리콘 밸리 - 팩션 형식으로 작성될 실리콘 밸리 입성기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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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이미지 출처: un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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