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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빠 May 29. 2022

선생과의 약속

18년 전 일본 연구소에서 


2004년 1월 나는 국내의 모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 당시 벌써 박사 4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low tier 논문 2편 외에 변변찮은 연구실적도 없었고, 한 명의 독립 연구자가 되기엔 나는 여전히 미숙했다. 그 이유는 내 역량 부족에도 있었지만, 당시 한국 이공계 대학원의 병폐와도 맞물린다. 탑티어 학교가 아닌 이상 연구실은 학술적 가치를 남길 수 있는 연구를 진행하기란 어지간히 쉽지 않았다. 연구실을 운영하기 위한 펀딩을 위해 지도 교수는 국책 과제뿐만 아니라 대기업, 중소기업의 외주성 과제를 닥치는 대로 수주해 왔고, 이러한 프로젝트에 참여한 대학원생들은 대학 연구실의 연구원이 아닌 회사의 개발실 직원들처럼 변해야 했다. 


개발 업무, 제안서, 보고서, 발표자료 등으로 지쳐가던 내가 마음 한편에 늘 품은 마음이 있었다.

'연구다운 연구를 하고 싶다'

그러다 우연히 한국 연구재단에서 주관하는 '이공계 대학원생 일본 연수 특별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무엇에 홀린 듯 프로그램 공고문을 읽어 내려갔고, 내가 응모 자격에 부합한다는 것을 확인한 즉시 지원서, 연구 계획서 등을 다운로드했다. 당시 개인적인 이유로 틈틈이 일본어를 공부해온 나는 일본어로 일상 회사를 구사하는 것에 자신이 있었다. 남은 문제는 프로그램에서 올려놓은 일본 국책 연구소들 중 내 전공분야와 일치하는 곳이 있는가였다. 연구소들의 웹사이트를 돌며 그들의 연구 주제를 샅샅이 훑었는데, 다행히도 딱 한 곳, 도쿄의 오다이바(お台場)에 위치한 산업기술종합연구소(AIST: National Institute of Advanced Industrial Science and Technology)에서 내 전공과 유사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비루한 대학원생인 내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렇게 보랏빛 희망을 품고 지원서 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프로그램 지원에는 우선 목표 기관의 연구팀 리더에게 승인을 받는 일이 필요했다. 일본의 연구팀장에게 연수 프로그램과 나를 소개하는 간단한 메일을 작성해 보냈고 하루 만에 답장을 받았다.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바다 건너 이웃 나라, 한 젊은 대학원생에게 자신의 연구팀에서 단기간이나마 연구를 할 기회를 준 것이다. 


지원서에 가득 담은 내 꿈과 희망이 통했는지 나는 최종 연수 합격자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해당 프로그램을 추진했던 한국과 일본 양국의 연구재단에서 간단한 교육을 받은 뒤, 재단에서 마련해준 아파트에서 AIST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연구팀장은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고, 함께 일하는 팀원들도 모두 친절했다.


마치 파리의 퐁피두 미술관을 연상시키는 무척이나 특별한 외양의 연구소. 사진출처: AIST


연구팀장은 당신께서 그동안 진행해온 연구와 소스코드를 아낌없이 공유해주며, 이를 통해 마음껏 내 연구를 진행할 수 있도록 날 도와주었다. 나는 한국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장비들로 원 없이 코딩하고 실험할 수 있었다. 온갖 잡무에서 벗어나 하루 종일 연구에 시간을 쏟을 수 있었기에, 전에 없던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연수 프로그램 허락한 것은 7주라는 짧은 기간이었다. 사실 그 기간 동안 새롭게 주제를 정하고 연구를 진행해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현재 근무 중인 미국의 회사도 여름에 인턴을 모집하면 기본적으로 3개월의 기간을 갖는다. 그리고 필요시 3개월 연장할 수도 있다). 연구팀장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연수기간 동안 내가 하나라도 더 배워갈 수 있도록 도왔고, 내가 인맥을 쌓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는 도쿄, 교토, 오사카 등 자신이 알고 있던 유수의 일본 대학 연구실에 나를 소개를 해주었고, 덕분에 일본의 유명 교수님들과 만나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7주의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갔다. 연구소에서의 마지막 날, 연구팀장은 연수 기간 동안 내 연구를 잘 지도해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했다. 지병으로 병원 치료를 자주 받았던 그는 연구실을 자주 비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항상 내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내가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여기서 싹을 틔운 연구를 계속하기를 바랐고, 실험을 위해 장비가 필요하면 개인적으로라도 언제든지 다시 방문하라고 했다. 혹시나 졸업 후 박사 후 연구원 생각이 있으면, 자신이 알고 있는 미국 대학 연구소에도 추천해 주겠다고도 했다. 그때까지 학계에서 무명에 가까웠던 내게 이렇게까지 신경 써준 그에게 잴 수 없는 깊이의 감사함을 느꼈다. 나는 그에게 약속했다.


"무라키 선생님, 꼭 좋은 연구자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학회에서 선생님을 꼭 다시 뵙겠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또다시 연구실 프로젝트에 복귀하여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몇 개월 뒤 일본에서 메일을 한통 받았다. 무라키 선생의 비서로부터였다. 청천벽력같은 무라키 선생의 별세를 알리는 부고였다. 지병이 갑작스럽게 상태가 악화되어 선생이 돌아가신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허망하게 가실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예약해 일본으로 건너가 장례식에 참석했다.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 연구와 함께했던 선생이었기에 가족이라곤 누님 한 분뿐이었다. 하지만 선생이 그동안 학계에 남긴 족적이 일본의 많은 학계 인사들을 장례식을 찾게 했다. 그들과 함께 슬픔을 함께 나눴다. 일본 학계에 커다란 별이 지던 순간이었다. 


한국으로 또다시 돌아온 나는 무라키 선생의 연구실에서 하던 연구를 계속했다. 프로젝트 성격으로 운영되던 그의 연구실은 선생의 죽음으로 폐쇄되지만, 다행히 같은 장비가 있던 교토 대학의 연구실에서 실험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정리해 미국의 한 학회에 포스터로, 일본의 학술지에 논문으로 제출했다. 논문을 작성하는 동안 저자 목록에 있는 무라키 선생의 이름이 나에게 늘 힘을 주었다. 


오늘은 무라키 선생이 돌아가신 지 만으로 꼭 18년 된 날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삼성을 거쳐 지금의 인텔에서까지 계속 연구를 업으로 삼고 있다. '학회에서 선생님과 꼭 다시 뵙겠다'던 약속은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되었지만, '좋은 연구자가 되겠다'라는 말만큼은 지키려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그것이 하늘의 별이 되신 선생과의 내 마지막 약속이기 때문이다.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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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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