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윤성로 교수팀 표절 사건에 대한 소고
제가 한국에 있을 때 학교에서나, 회사에서나 논문은 제1저자가 쓰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연구는 지도교수, 팀원, 상사들과 함께 진행하곤 하지만, 실제 논문은 제1저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쓰는 것이 당연했죠. 초안이 나오면 공저자들은 검토의견을 주곤 했지만, 논문 작성을 함께하는 수고까지 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 시간에 차라리 자신의 다른 업무나, 자신이 1 저자로 논문을 쓸 수 있는 연구에 더 시간을 쓰는 것이 더 낫다고들 생각했죠.
미국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며 놀란 것 중 하나는 공저자(co-author)는 말 그대로 '논문을 함께 쓰는' 저자라는 것입니다. 이때 재미있는 것은 논문 작성을 프로그램 코딩하듯 한다는 것이죠. 복수의 개발자가 하나의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쓰는 협업 시스템인 github를 논문 작성 시에도 유용하게 쓰거든요.
연구 결과가 성숙해 논문 쓰게 될 시점이 되면 1 저자는 github에 저장소를 하나 열어 latex 파일들을 업로드합니다. 서론, 관련 연구, 본론, 실험, 결론 등 각 섹션별로 별도의 latex 파일들을 만들어 올리는데, 최초에는 각 소제목만 있고 내용은 비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들은 자신이 맡은 파트를 채워나갑니다. 그리고, 내용이 갱신될 때마다 저장소에 수시로 commit을 합니다. 그렇게 버전 관리를 통해 내용을 수시로 확인하고, 주기적인 회의를 통해 텍스트를 수정해 나가게 됩니다. commit 할 때마다 이력이 남기 때문에 서로가 작성한 문장의 변경 사항을 함께 공유하며 수시로 리뷰하고 피드백을 주게 되죠.
논문 제출 마감일 1주일 전이면 crunch 모드로 돌입하는데, 이때는 별도의 sync-up회의 없이 실시간 채팅으로 의견을 교환하며 완성본을 함께 탈고합니다. 그 과정에서 저같이 비영어권 연구원이 작성한 문장들은, 영어권 연구원들에 의해 자연스레 교정되죠.
논문 작성에 참여하는 동안 공저자라 해도 그 논문이 자신의 것이라는 주인의식이 강합니다. 팀 주간 회의에서도 주저자만큼이나 자신이 '논문을 쓰고 있다'라고 자연스럽게 이야기 하고, 왠만한 질의 응답도 다 담당하죠. 이렇게 공저자는 연구 과정뿐 아니라 논문 작성 시에도 그만큼의 지분으로 책임을 지는 시스템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논문이 작성되면 논문 표절과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저자 중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베껴온 문장을 삽입하더라도, 작성 과정에서 다른 공저자에 의해 걸러지게 되기 때문이죠. 설사 공저자가 인지하지 못한다 해도 수시로 함께 하는 퇴고 작업을 거치면서 초안의 문장이 최종본까지 그대로 남을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쓴 문장이 바로바로 공저자에게 노출되는 이런 환경에서 '표절'을 저지르는 것은 심리적으로 매우 부담스러운 짓입니다.
이번 서울대 논문 표절 건을 보면서 왠지 모를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을 보아하니 상당히 많은 문장들을 다른 논문에서 가져온 것 같던데, 이는 절대 용서될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해당 저자가 논문을 작성하기 전까지 수행한 '실제 연구'마저 표절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뭔가 기존에 없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했겠죠. 그 결과를 갖고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기존 논문에서 재활용(?)할 수 있는 문장을 최대한 가져온 것입니다. 연구를 수행하지 않고 짜깁기로만 논문을 쓸 수는 없고, 설사 어떻게든 썼더라도 그것이 학회 peer review에서 통과될 리 만무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연구 독창성은 여전하다고 1 저자는 주장하고 싶을 것 같지만 논문을 쓰며 단 한 줄을 가져오더라도 '표절은 표절'인 것입니다.
이번 일이 터진 뒤 1 저자, 공저자, 교신저자 모두 나름대로 사과로 입장 표명을 했지만 다른 이들의 공감을 전혀 못 사고 있습니다. 책임을 통감하면서도 이구동성으로 '1 저자의 표절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라고 변명합니다. 물론 이 또한 거짓말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자신의 이름이 저자로 같이 들어가는 논문이 표절로 점철되는데도 모를 만큼 논문 작성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입니다. 표절에 대한 책임을 함께 뒤집어쓰느니 차라리 free rider라 비난을 받는 게 낫다는 심리입니다. '알았으면 공범이고 몰랐다면 무능'인 상황에서 무능을 택하는 것이 당연한 법인 가요?
안타까운 것은 이번 일이 연구 윤리에 대한 몰지각이 빚은 참사라는 것입니다. 황우석 사태를 겪었으면서도 한국은 연구 진실성의 중요함을 여전히 간과하고 있습니다. 국가 과제는 실적 위주로 평가되고, 교수와 연구실은 더 많은 연구비 확보를 위해 논문 실적에 열을 올립니다. 그렇게 연구실은 논문을 찍어내는 공장이 되어가면서, 학생들은 연구 과정의 진실성보다 빠르게 결과를 내는 것에 최적화되어 갑니다. 당장 유튜브를 봐도 대학원생들이 올린 '논문 4일 만에 쓰는 법' 같은 콘텐츠가 넘쳐나죠.
얼마 전 과제 협력 건으로 알게 된 캘리포니아 모 주립대의 한 교수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는 박사과정일 때도, 교수가 된 이후에도 훌륭한 논문들을 발표해 왔던 학계에서 주목받는 라이징 스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구실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고 했는데, 임용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하지만, 학생수가 적정 수 이상 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관리한다고 합니다. 이유는 학생수가 필요 이상 많아지면 자신이 모든 학생을 지도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라죠.
"연구실 규모가 커지면 교수는 학자가 아니라 매니저처럼 일해야 합니다. 저는 제 학생들과 함께 직접 연구도 하고 논문도 함께 쓰는 학자로 남고 싶어요."
그의 눈빛은 안경 너머로 매우 반짝거렸습니다. 다소 순진해 보일 수도 있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그는 아직까지 충분히 젊습니다. 하지만, 짐작컨대 연구에 대한 그의 진심은 노교수가 될 때까지 변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또 확실한 하나는 그와 그의 연구실의 향후 궤적에 '표절'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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