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 안 현금 다발

이직 안 하면 몸값 떨어지는 이상한 세상

by 예나빠


"우연이 아닌 선택이 운명을 결정한다"
-진 니데치(Jean Nidetch)



미국에 살다 보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다. 야근도 없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도 많다. 스케줄에 쫓겨 밤을 오롯이 불태우던 다이내믹 코리아의 속도감과는 확연이 다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조급해하지 않는다. 심지어 뭔가 안정감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곳이 바로 이 미국이다. 반복되는 느린 일상 때문에 사람들의 표정에는 따분함, 무료함, 답답함으로 가득하다.


어쩌다 보니 나는 지금 미국 실리콘 밸리의 한 반도체 기업에서 엔지니어로 일을 하고 있다. 햇수론 여섯 해를 맞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데 이제 몇 년만 더 지나면 한국 회사에서 보낸 시간과 맞짱을 뜨게 된다.


손가락으로 미국에 온 세월을 세다 보니 역시나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직을 위해 미국에 온 지 벌써 5년이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던 어느 날 내 지루했던 일상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안녕. 나는 A사 리서치 부서를 담당하는 HR 직원 '몰랑이'야. 우리가 지금 연구팀을 새로 꾸리고 있어. 그리고 그 팀의 테크 리드를 새로 채용 중이야. 관심 있으면 지원해 볼래? 아니면 누군가를 추천해 줘도 되고"



사실 실리콘 밸리에서 근무 중인 엔지니어라면 흔하게 받는 메일이다. 빅테크든 스몰테크든 스타트업이든 실리콘 밸리의 IT기업은 언제나 인재 확보에 목마르다. 그래서 신규 인력을 채용할 때 이력서가 접수되기만 기다리지 않는다. 바로 HR 직원들이 직접 발품을 팔러 다니는 것이다. 가능한 많은 후보자들을 확보하기 위해 동종업계 엔지니어들에게 '혹시 이직 생각 있어?'라며 쿡쿡 찔러본다.


그래서 이런 메일에는 종종 어그로가 담긴다. 수신자의 이목을 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사람을 뽑고 있다'. '네 이력이 정말 훌륭하다'. '채용 중인 자리와 잘 맞을 것 같다'. 심지어 '우리는 그동안 너를 계속 주시해 왔다'. '사내에 너를 추천하는 이들이 있었다'라는 신뢰감 0의 멘트까지 남발한다.


그래서 복붙으로 일관된 이런 메일을 계속 받다 보면 자연스레 자체 검열을 하게 된다. 내 이력과 하등의 관련 없는 자리를 소개하거나, 안정성이 떨어지는 스타트업을 추천하면 '에이 뭐야' 하면서 알아서 필터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메일은 뭔가 좀 솔깃했다.


A사라면 현직장인 I사의 강력한 경쟁사이자 반도체 업계의 신흥 강자가 아니던가. 10여년 전 부임한 CEO가 회사의 체질 개선을 끝낸 이후, 빠른 속도로 I사의 시장을 잠식하며 성장가도를 달리던 회사였다. 주가는 연일 상한가를 쳤다. 게다가 채용 포지션이 나와 전공 일치도도 높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아쉬웠던 대목이 있었다.


'아니면 누군가를 추천해 줘도 되고'


라니. 이건 '네가 아니어도 괜찮다'라는 말 아닌가. 추천은 자기 회사 직원에게 받아야지 자리를 제안받는 사람한테 또 받으려 하면 애초의 진정성이 의심되잖아. '역시 복붙으로 보낸 메일이었던가'라며 잠시 기분은 상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럼에도 충분히 매력적인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난 A사로의 이직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상대적으로 노동 유연성이 높다. 회사든 직원이든 쉽다. 직원을 단칼에 해고하기도 회사를 훌쩍 떠나기도. 그래서 이곳에서 몇 년만 일하다 보면 팀에 새로 합류하거나 팀을 떠나는 이직자를 숱하게 만나게 된다. 어찌 그리 좋은 회사들로 잘들 찾아가는지 능력도 좋다. 퇴직 인사를 하러 찾아온 한 동료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렇게 좋아?'


두 번 말해 뭐 하랴. 최소한 연봉 30% 이상 더 잘 받게 될 테니 말이다. 이들에게 이직은 커리어와 연봉 향상을 한 번에 이뤄주는 에스컬레이터다. 반대로 회사에 계속 남는 것은 결국 108 계단을 슬로모션으로 걸어올라는 것과 같다. 애사심이든 귀찮아서든, 회사에 장기 근속하는 것은 마치 현금 뭉치를 장롱에 묵혀두는 꼴이다.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재화를 불리지 않고 묵혀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장롱 속 현금 다발 같은 인생. 이미지 출처=예나빠 태블릿



이는 미국 회사의 연봉 상승률이 극도로 미미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물가 상승률에 못 미칠 때도 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이직을 하지 않으면 시장가 대비 자신의 몸값만 떨어지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다. 게다가 장기근속이 그리 미덕도 아니다. 한국처럼 상패, 포상, 휴가로 기념해주지도 않는다. 심지어 어떤 회사는 매니저 평가 항목으로 팀원의 회전율을 본다고 했다. 팀에 고인물이 많을수록 활력이 떨어진다는 해괴한 논리다.


그래서 실리콘 밸리의 엔지니어들이 이직을 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바로 그들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 업무 스트레스, 조직 문화와 같은 구체적인 사유가 없어도 더 좋은 제안이 들어오면 언제든 회사를 드라이하게 떠난다.


그래서 이들에게 애사심, 충성심 이런 건 남의 이야기다. 그들이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의 경력일 뿐이다. 아이러니한 건 이런 그들의 이기심이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서 회사를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5년간 실리콘 밸리에서 근무하며 알게 된 얼마 안 되는 진실이었다.


한 회사에서 5년. 이제는 때가 되었다. 나는 보르도 와인처럼 푹 숙성되었다. 일이 쉽다. 이쯤 되면 선택의 길이 찾아온다. 그 '쉬움'을 즐기며 안주하는 것과 새로운 '도전'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것. 새로운 도전이라니 멋진 말이다. 하지만 까놓고 말해 같은 조건이면 안주하는 쪽을 택하련다. 무사안일, 복지부동, 보신주의가 지탄받아야 할 생각일지 모르나 내 '안녕'을 지키고 싶은 것은 누구에게나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새로운 도전을 감행할 동기 부여는 '같은 조건'이 아니라는데서 얻는다. 세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첫째, 더 나은 연봉. 둘째, 더 나은 연봉. 셋째, 더 나은 연봉.




하루 뒤 A사의 HR 직원 몰랑이에게 답장을 썼다. 이럴 때 즉시 답장을 쓰는 것도 그리 좋지 않다. 일없이 한가해 보일 수도 뭔가 아쉬워 보일 수도 있다. 출발점에서 강하게 자기 암시를 건다. 나는 구직자가 아니라 이직자라고. '네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메일에 나도 '너희 회사가 아니어도 괜찮다'라는 분위기를 풍긴다.


"몰랑아 안녕. A사에서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연락해 줘서 고마워. 제안해 준 자리를 검토해 봤는데 흥미로워. 논의를 시작해 볼까?"


뭔가 최대한 쿨하고 드라이하게 썼다. 몰랑이는 즉시 화답했다. 본격적으로 인터뷰 절차를 개시한 것이다. 사실 답장을 쓰기까지 고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터뷰를 제안받은 자리가 테크 리드(Tech Lead), 실무자가 아닌 실무형 관리자였기 때문이다. 관리가 싫어 실무만 하고자 미국에 왔는데 또다시 이런 선택의 기로가 찾아왔다.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 출처: 예나빠 태블릿 마우스




"팀을 꾸려줄 테니 팀원들과 이 프로젝트를 잘 진행해 봐"


한국의 S사 연구소에 근무중일 때 난 '어쩌다' 중간 관리자가 되었다. 언제까지 실무자로 남아있을 수는 없는 연차였지만 그럼에도 꽤나 갑작스러웠다. 연구소 특성상 다들 고학력, 고경력, 고스펙의 인재들이라 평균연령이 높았다. 40을 넘는 팀원들도 즐비했고 보직없는 부장들 과장들이 바글 바글 섞여 한 팀을 이뤘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도 언제까지나 실무만 할 것 같았다.


출장을 다녀온 뒤 경쟁사 동향과 함께 새로운 연구 주제를 기획해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 발표 무언가가 그룹장이었던 '능력쩔' 부장의 심금을 울렸다. 크게 감흥을 받은 능력쩔 부장은 파일럿 프로젝트를 내게 준비시켰고 소수의 팀원을 붙여주었다. 그 뒤로 과제 기획, 제안, 협력 기관 섭외, 과제 관리, 팀원 관리, 사업부와 소통, 보고 등 관리업무를 실무와 병행했다.


몸은 고됐지만 팀에서 성과가 나올 때는 뿌듯했다. 연구가 성숙해 사업부로 기술 이전이 확정된 순간 팀원들과 축배를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빨랐고 시장은 우리 기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렇게 내가 5년간 끌어오던 팀은 자연스레 해체 수순을 밟았다. 관리자가 아닌 실무자로 은퇴하겠다 결심한 것이 그즈음이었다.




A사와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했다. A사 리서치의 다른 팀장들, 임원급, 실무 엔지니어들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테크 리드를 뽑는 자리여서인지 세세한 실무 지식부터 고수준의 식견에 대해서도 질문받았다. 3라운드까지 도합 7-8명은 만났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라 나와의 접점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전혀 모르는 질문을 받았을 때는 '몰라'라고 하기보단 영혼을 끌어모으고 머리를 쥐어짜 대답했다.


모든 인터뷰를 소화하는 데만 두 달 넘게 걸렸다. 그 뒤로 몰랑이와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결과를 담담히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 인터뷰가 끝난 지 3주가 지났을까, A사의 채용 사이트에서 내가 지원했던 포지션의 채용 공고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뭐지? 결과도 가르쳐주지 않고 채용을 닫아버리다니..'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다른 후보자가 뽑혔거나, 아니면 기간 내 적합한 사람을 찾지 못했거나. 그게 뭐든 심히 좋지 않은 신호였다. 문의 메일을 보냈고 며칠 뒤 몰랑이에게 답장이 왔다.



"우리가 적합한 인물을 시장에서 찾지 못했어. 그래서 실무 연구원들을 먼저 뽑고 이후 테크 리드를 뽑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거든. 그런데 너는 연구원 후보로도 유효해. 여전히 관심 있어?"



수락도 거절도 아닌 이 애매한 상황은 뭐지? 코미디 같은 미국 이직 시장의 희망 고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