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사는 나와 핏이 안맞는 것 같군요

나는 청바지가 아냐

by 예나빠


"갈등과 모순은 삶의 본질"
- 헤겔(Hegel)



미국 구직 시장에 회자되는 '핏(Fit)'이라는 말이 있다. 요즘은 '핏이 좋다, 핏이 맞다'라며 한국에서도 자주 쓰는 것 같다. 한마디로 '회사와 직원의 궁합이 얼마나 좋은가'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미국에서 이 말을 가장 많이 쓰는 사람은 바로 HR 직원들이다.


"이 자리는 당신에게 적합하지 않습니다 (This position does not fit for you)"


그들이 구직자에게 인터뷰 결과를 통보할 때 이렇게 사용하곤 한다. 얼핏 들으면 '서로의 필요가 맞지 않았을 뿐, 네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뉘앙스로 들린다. 구직자를 배려하는 듯한 표현이지만 사실은 직접적으로 거절 사유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일뿐이다.


이유를 세세하게 알려줬다가 '차별'이라는 이유로 소송이라도 당하면 회사가 아주 골치 아픈 상황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적합하지 않다'라는 애매하고 완곡한 말로 끝내 버린다. 그러니 사실은 '이유는 알아서 해석해라'라는 매우 불친절한 표현인 셈이다.


구직자 입장에서는 이유라도 제대로 알면 다음을 준비할 때 많은 도움이 된다. 그래서 이런 애매한 대답을 들으면 아주 답답해진다. 오래 사귄 연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해서 헤어진다'라고 이별 통보를 받으면 미치고 팔짝 뛰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나는 이 '핏'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나는 이 말을 또 듣고야 말았다.




"우리가 해당 포지션에 적합한 인물을 시장에서 찾지 못했어. 그래서 실무 연구원들을 먼저 뽑고 이후에 테크 리드를 뽑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거든. 그런데 너는 연구원 후보로도 유효해. 여전히 관심 있어?"


석 달에 가까운 면접을 보고도 내 인터뷰가 결론이 나지 않자 나는 허탈해졌다. 그 이유를 알려준 HR 직원 몰랑이의 말에 "지금 장난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대로 삼켜 넘겼다. 여기까지 온 이상 끝은 봐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변경된 포지션은 내가 I사에서 하고 있던 '실무 연구원'과 같은 자리였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가졌던 고민, '관리자가 되는 부담'도 이제는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미국에서는 '관계'가 중요하다. 기분대로 말을 내뱉는 것은 결국 독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흔쾌한 척 대답했다. "Sure!"


그리고 '실무 연구원' 포지션으로 새로운 인터뷰 라운드가 펼쳐졌다. 우선 최근 A사에 합류했다는 한 연구원과 화상 면접이 잡혔다. HR로부터 면접관의 이름을 고지받았을 때 무릎을 탁 쳤다.


'놀놀이? 아는 녀석이잖아?'


놀놀이는 직접 같이 일해본적은 없지만 안면은 있는 친구였다. 같은 분야에 종사하다 보니 한 다리만 건너면 연결되고 서로의 이름은 친숙한 딱 그 정도의 관계. 그런데 내가 알기로 놀놀이는 나와 같은 I사 직원이었는데 언제 A사로 이직한 걸까. 참 발 빠른 녀석일세.


그렇게 서로 이름만 알던 우리는 면접관-이직자 입장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한 줌도 안 되는 인연을 최대한 부풀려 면접시간을 채워나갔다. '오래전부터 네 연구를 지켜보고 있었어', '매우 인상 깊게 생각해', 'I사에서 네가 쓴 논문들 다 봤어. 매우 영향력이 느껴지더라'.


칭찬에 장사 없다. 출처=예나빠 태블릿


슬기로운 인터뷰는 아부로부터 출발한다. 나는 혀에 기름을 듬뿍 칠해 말을 풀어나갔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들어온 놀놀이를 어떻게든 천국으로 보내주려 했다. 놀놀이는 잠시 '허허허'하고 웃었지만 예의 그 심각한 표정으로 바로 돌아가려 했다. 나는 아직 그를 천국행 열차를 태우지 못했다. 바로 화제를 바꿔 둘만 아는 'I사에서의 이야기들'로 면접시간을 또 잠식하려 했다.


"그만하고 이제 기술적인 이야기를 해 볼까?"


"아.. 그래 (시무룩)"


잠시 어색함이 감돌았지만 이후의 인터뷰 시간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같은 분야라 말도 통했고 질문 난이도도 평이했다. 하지만, 놀놀이는 가끔씩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는데 '통상의 업계 지식'으로는 대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즉 정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I사에서 면접관이었던 적도 많았기 때문에 그 의도가 자연스레 읽혔다.


'아주 생소한 가정' 즉 듣고 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문제를 주고 '너라면 어떻게 해결할래?'라고 질문한다. 이 경우 현재 면접관이 겪는 문제일 확률이 높다. 자신도 아직까지 풀지 못한 문제 그러니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문제를 들고 와 구직자에게 툭 하고 던지는 것이다. 질문을 하면서도 큰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때 구직자가 신박한 해법이라도 내놓으면 점수는 급격히 올라간다.


내게는 면접관의 의도를 읽을 수 있을 경력은 있었지만, 짧은 순간에 신박함을 풀어낼 천재성은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경험을 급하게 조합해 두루뭉술하게 눙치는 것뿐이었다. 내 어설픈 대답에 놀놀이는 뜨끈 미지근한 표정을 지었다.


놀놀이의 표정은 정직했다. 이미지 출처=예나빠 태블릿


면접의 후반부로 돌입하면서 질문의 스케일이 커지고 추상화 수준이 높아졌다. '이 분야의 미래가 어떻게 될 거라 생각해?', '우리 회사에 들어온다면 어떤 연구를 하고 싶어?'와 같은.




기억도 아득한 보명 제7사단 훈련병 시절이 떠올랐다. 피가 나고, 알이 배기며, 이가 갈리는 사격 전 예비 훈련을 끝내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사로에 엎드렸을 때 과녁은 깨알같이 보였다. 훈련받은 대로 조준간을 '단발'로 바꾸고 과녁을 향해 K2 소총을 조준했다.


예나빠의 쿨내 나는 전지무의탁 자세. 출처=예나빠 태블릿


사격장은 군대에서 유일하게 구타가 허용되는 장소라 했다. 단 하나의 실수로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로에 엎드린 훈련병들은 모두 긴장하며 자신의 과녁에 집중했다. 모두들 방아쇠에 검지 손가락을 걸고 사격 통제관의 다음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준비된 사수부터 사격개시!"




나는 놀놀이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준비된 대답을 개시했다. 내 입에서 그 대답이 단발이 아닌 연발로 발사되었다. 경력이라는 것은 이럴 때 빛난다. 미래 전망은 매일 고민하고 대답하던 주제였다. 점쟁이도 아닌데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을리 없다. 하지만 중간 관리자가 되면 상상력을 발휘해 창작이라도 해야한다. 그게 프로젝트 기획의 첫 단계니까 말이다.


그렇게 입으로 한참을 신나게 총질을 하고 있는데, 내가 쏘아낸 총알의 탄피 하나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놀놀이가 갑자기 말을 끊고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 하드웨어 시스템 연구를 하고 싶다고? 마침 잘 되었는 걸"


"응?"


"네 이력서를 보면서 계속 느낀 건데, 넌 리서치보다 사업부 아키텍처 팀과 더 잘 맞는 것 같아. 그쪽도 새로 팀이 하나 조직돼서 사람을 뽑고 있거든, 네가 하던 연구 분야와 맞는 것 같고".


나는 다시 한번 더 내 의사를 강하게 밝혔다. 이미 존재하는 알고리즘을 제품화하는 아키텍트의 일보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기술을 발명하는 리서치가 좋다고. 하지만, 칼자루는 놀놀이가 쥐고 있었다.



"너는 우리보다 그 팀에 더 잘 맞는 것 같아 (You are fit for that team rather than ours)"



그렇게 놀놀이이게 그리도 싫어하던 '핏'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청바지가 아닌데 왜 남의 다리에 맞춰서 재단되어야 할까. 미국의 이직 시장은 그랬다. 가끔은 내 선호와 상관없이 내 이력이 판단된다. 누굴 탓하랴 그게 내가 걸어온 길인 것을.


어쩌면 그저 내가 놀놀이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너는 우리와 잘 안 맞는 것 같다'라는 말은 사실 '우리 팀에 들어오기엔 너는 부족해'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상대에 대한 배려로 포장된 이 핏이라는 말은 그래서 들을수록 더 언짢아진다. 그래서 하마터면 이렇게 말할 뻔했다.


'아니, 사실 너의 회사가 나와 핏이 안 맞아’


면접은 그렇게 찜찜하게 끝났고 며칠뒤 HR 직원 몰랑이에서 또 연락이 왔다. 역시나 찜찜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나는 또다시 새로운 인터뷰 라운드로 빨려 들어갔다.



(계속)



이전 01화장롱 안 현금 다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