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과 전달을 위한 효과적인 글쓰기 방법
엔지니어에게 코딩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답은 글쓰기다. 직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엔지니어는 업무상 글쓰기를 피할 수 없다. 아이디어를 보호하기 위해 특허를 쓰며, 설계한 모듈을 설명하기 위해 스펙을 쓴다. 제품 출시가 가까워지면 매뉴얼이나 사양서를 기술하며, 새로운 기능을 홍보하려 홈페이지나 SNS에 기사를 작성한다. 회사를 대표해 표준화 활동을 하면 스펙의 제안서를 쓴다. 연구직인 경우 논문을 쓰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엔지니어들은 업무시간에 수시로 짧은 글을 쓴다. 진척사항을 요약하는 보고서, 발표를 위한 파워포인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메일을 쓰며, 하다못해 코딩을 하면서도 코드의 의미를 설명하는 주석을 단다.
엔지니어는 왜 글을 쓰는 것일까? 바로 '설득과 전달'을 위해서다.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납득시키고, 정확한 정보를 고객에게 전파한다. 논문, 특허, 제안서, 기사는 '설득'을 스펙, 매뉴얼, 사양서, 보고서, 발표자료, 메일, 주석 등은 '전달'을 위한 글이다.
엔지니어에게 글쓰기란 일종의 마침표와 같다. 엔지니어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학적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단계는 마지막에 있다. 그 결과물을 소비하는 고객을 상대로 '설득하고 전달'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고객은 최종 소비자나 고객사뿐만 아니라, 유관부서 엔지니어, 특허청, 학회, 저널, 심지어 동료와 상사 모두 해당된다.
고객을 위한 글쓰기가 성공적으로 이뤄졌을 때 엔지니어 업무가 비로소 완성된다. 엔지니어가 설계와 구현 능력이 뛰어나 훌륭한 공학적 결과를 이끌어내도, 이 마침표를 제대로 찍지 못하면 고객을 만족시키지 못해 결과물은 빛을 잃고 만다. 그래서 엔지니어에게 실무능력만큼이나 중요한 역량이 바로 글쓰기인 것이다.
엔지니어의 글쓰기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물론 엔지니어가 쓰는 문서는 다양하고 각각 쓰는 요령이나 방법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설득과 전달'이라는 공통의 목적 아래 그 모두를 관통하는 철칙은 분명히 존재한다.
어떤 문서든 담고 싶은 말, 주제가 있다. 전체 문서의 내용을 요약해 한 줄로 바꿔 쓸 수 있다면, 바로 그 글의 주제가 된다. 특히 '설득의 글'은 독자를 도입에서부터 결론까지 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각 계층적 단락마다 적절히 정보와 근거를 배치해 조금씩 설득력을 확보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문서 전체의 내용이 주제에 집중해야 한다. 상관없는 정보, 문제들을 끌어와 글의 진행을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면 안 된다. 논점을 이탈하게 되면 논조가 흐려져 독자에게 길을 잃게 만들기 때문이다.
간혹 대화나 토론을 할 때 중언부언하고 있으면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라는 말을 듣기 쉽다. 마찬가지로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지?'라는 의구심을 들게 만든다면, 글에서 주제를 명확히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득력이 사라져 문서가 그 목적을 상실하고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
설득을 위한 글에는 쓰는 이의 주장이 담긴다. 그리고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근거를 남겨야 한다. 간혹 사실과 주장을 혼돈하곤 하는데, '사실'은 역사적으로 이미 증명되어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이며, '주장'은 아직 입증되지 않은 본인만의 생각이다. 사실은 근거를 남길 필요가 없고 그대로 기술만 하면 된다.
엔지니어가 쉽게 범하기 쉬운 실수가 주장을 사실이라 착각하며 글을 쓰는 것이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주장을 남들도 당연히 인정할 것이라 알게 모르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글을 쓸 때마다 스스로에게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글에서 주장을 펼칠 때마다 관성적으로 '왜'에 대한 답을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문에서는 주장에 힘을 싣고자 참고 문헌을 인용하고, 수학적으로 증명하거나, 실험 결과를 첨부한다. 특허는 아이디어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선행기술(Prior Art)과의 차별점을 입증한다. 제안서에서는 제안하는 기술이 고객에게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려 시장 동향, 전망 리포트, 통계 등의 자료를 적극 활용한다.
엔지니어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바로 실험이다. 실험 조건에 따라 결과의 신뢰도는 달라질 수 있지만, 일단 실험 데이터가 있다면 주장을 뒷받침할 최소한의 근거가 되어준다. 숫자로 말하고 소통하는 것이 일상인 엔지니어들에게는 구체적인 데이터가 곧 논리이기 때문이다. 시간 관계로 실험을 하지 못한다면 수학 모델을 활용하거나 통계 분석 결과라도 활용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주장에는 최소한의 근거가 담겨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작가는 독자를 염두하며 글을 쓴다. 작가의 생각을 이해시키는 것이든,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든,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든 작가의 글에는 반드시 그 의도가 담겨있다. 그런데 독자는 글에서 작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읽어낼 수는 없다. 심지어 독자들 사이에서도 다른 해석을 내린다. 나이, 생각, 가치관, 배경 지식, 지적 수준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엔지니어가 쓰는 글에서는 최대한 이 간격이 없어야 한다. 고객이 엔지니어의 의도대로 공학적 결과물을 소비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엔지니어가 글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려면 문장에서 오해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 같은 문장이라도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면, 노이즈가 낀 왜곡된 정보가 독자에게 도달하게 된다.
문장은 구체적이고 명료해야 한다. 대상을 가리킬 때 명칭을 생략하거나, 대명사를 남발하고, '~부분', '~측'과 같이 포괄적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경우, 같은 대상에 대한 명칭을 다른 용어들로 섞어 쓰는 경우, 주어가 불분명한 경우, 영미권 문장에 익숙해져 수동태를 남발하는 경우 (요즘은 미국도 능동태를 많이 쓴다), 영문 줄임말을 쓰면서 본딧말을 추가하지 경우와 같이 구제적으로 쓰지 않은 글은 고객을 혼란에 빠트린다.
엔지니어가 불분명한 문장을 작성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자신의 생각이나 지식을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할 어휘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밑에서 또 말하겠지만 꾸준한 독서를 통해 어휘력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 둘째는 자신이 전달하려는 정보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근거가 부족하거나 결과가 미성숙해서다. 하지만 이렇게 '알아서 해석하라'라는 식으로 무책임하게 글을 쓸 바엔 차라리 비워두고 'TBD(To be described)'를 남기는 것이 낫다. 추후 근거나 결과를 보강한 뒤 글을 업데이트하는 것이 독자의 오해를 줄이는 길이다.
엔지니어는 글을 쓸 때 자기 객관화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글을 본 적이 있다. 논문 리뷰어로 활동하는 한 학회에서 몇 년 전 논문 리뷰를 부탁받은 일이 있었다. 논문을 읽어 내려가다가 탁하고 막히는 문구가 있었다. 'Good performance'. 저자는 자신의 방법이 '좋은 성능'을 보장한다는 것을 말하려 했다. 하지만 엔지니어의 글에서 이런 주관적인 표현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해당 논문의 저자는 단순히 '좋은 성능'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숫자로 말했어야 했다.
엔지니어의 글에서는 철저하게 객관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아직 입증되지 않은 주장은 구체적인 논리로 무장하고 사실은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해야 한다. 따라서 글을 쓰면서도 내 주관에 의존하고 있지 않는지 계속 돌아보아야 한다.
'설득과 전달'의 글에서 주관이나 감정이 개입하는 순간 힘을 잃고 만다. 감정에 사로잡혀 주장을 전개하다 보면 자칫 논리의 오류에 빠지기도 쉽고 주제에서 벗어나는 글을 쓰게 된다. 근거와 사실을 다루면서 자신의 주관을 고집하다 보면 심하면 데이터 조작, 논문 표절과 같은 직업윤리를 훼손하는 일까지 저지를 수 있다.
엔지니어가 쓰는 글은 에세이가 아니다. 감수성을 뽐내거나 화려한 미사여구가 필요한 글이 아니다. 따라서 글은 최대한 짧고 분명하게 쓰고 논리를 희석시키는 형용사, 부사들은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 좋다.
논리적인 글쓰기를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시중에도 관련 서적이 넘쳐난다. 전제와 결론을 구별하고, 근거를 제시하는 법, 논리학의 규칙과 요령,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법, 삼단논법, 연역적, 실증적 논증방법까지 자세하게 알려준다.
이런 복잡한 논리학의 기술을 알지 못하더라도, 앞에서 말한 오류들을 줄이면서 논리적인 글을 쓸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다. 그 첫걸음은 모든 단락과 절을 최대한 '두괄식'으로 작성하는 것이다. 일단 내가 하고 싶은 말, 핵심 주제, 결론을 먼저 지르고 나면 자연스럽게 다음 문장에서 이유와 근거를 추가하게 된다. 이런 단락들이 모이면 주제에 벗어나지 않은 한 편의 글이 만들어진다. 실제로 논문, 기사, 에세이 등 영미권의 글들은 대부분 두괄식으로 작성되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귀납식 사고가 익숙한 한국인들은 두괄식 문장을 전개하는 것이 처음부터 쉽지 않다. 배경 설명 없이 결론을 내려버리는 것에 심리적 거부감마저 든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읽어온 글, 자연스럽게 익힌 화법은 모두 미괄식이기 때문이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두괄식으로 쓰기 시작하고, 이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글을 쓰기 쉽다. 특히 첫 문장을 쓰기 어려워할 때가 많은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표현하는 데 있어 어떤 문장으로 시작할지 고민하기 때문이다. 고민할 필요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의 결론부터 쓰면 그다음 문장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두괄식 문장은 독자입장에서도 읽기 편한 글이다. 작가가 자신의 패를 먼저 보여주며 글을 시작하기 때문에 독자의 호기심과 궁금증이 조기에 충족된다. 극단적으로 말해 단락의 첫 문장만 보면서 글을 읽어도 전체 내용이 이해되기 때문이다.
독서는 사고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지만 그만큼 글쓰기에도 큰 역할을 한다. 앞의 다섯 가지의 원칙을 지키며 엔지니어가 글을 쓰면, 적어도 고객에게 퇴짜 맞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원칙을 지키며 글을 쓰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사전에 좋은 글에 충분히 노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논리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는 풍부한 어휘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글은 자신의 표현이고 엔지니어에게 글은 설득과 전달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 지식, 정보를 올바르게 글로 옮겨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충분히 많은 어휘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말을 통해서만 단어를 접하면 빈약한 어휘력을 벗어날 수 없다. 한국어 표준국어대사전의 단어수는 약 42만 개인데, 그중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1000여 개에 불과하다. 말은 그조차도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휘발되어 버린다. 반영구적인 텍스트를 눈으로 담아내는 방법, 즉 독서가 어휘력을 키우고 나아가 좋은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된다. 엔지니어에게 독서가 필요한 두 번째 이유다.
이번 글에서는 개괄적인 엔지니어의 글쓰기 원칙을 살펴보았다. 다음 주에는 각론으로 논문, 특허, 스펙, 발표자료와 같이, 문서별로 어떻게 효과적으로 글을 쓸 수 있는지를 이야기해 볼 것이다.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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