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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빠 May 19. 2024

영어를 원어민 수준까지 준비해야하는 이유

한국에서 공부했던 영어가 내 실력의 상한선


<이전에 올린 글을 재가공한 글입니다>



가끔씩 한국에 있는 분들에게 '미국 빅테크 기업에 입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영어 수준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내 현재 영어 수준과 별개로 "원어민 수준까지 준비하고 오세요"라고 한다. 대부분 "농담하지 말고", "너는 그럼 그 정도 해서 미국 갔냐?", "빈정거리는 거냐", "재수 없다"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물론 다소 과장이 섞인 대답이다. 하지만 내 의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


방점은 다른 곳에 찍혀있다. 질문자 입장에서는 '입사'에 초점이 맞춰있겠지만, 나는 조금 다른 곳을 바라본다. 입사한 미국 회사에서 안정적으로 커리어를 이어가는 모습 말이다. 사실 질문자의 의도대로 '미국 회사 입사'만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원어민 수준까지 필요 없다. 전화, 현장 인터뷰, 코딩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 인터뷰어와의 언어 장벽(Language Barrier)을 가까스로라도 넘을 수 있으면 된다. 엔지니어가 말로 먹고사는 직업도 아니고, 영어가 모국어도 아닌 외노자에게 원어민 수준까지 요구하는 것도 난센스다. 


그럼에도 원어민 수준까지 준비하라라고 한 것은 영어를 잘하면 잘할수록 좋다는 막연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미국 이주를 계획하는 한국인들의 목표가 단순히 미국 회사에 입사하는 것이 아닐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성공적으로 미국 사회에 편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실제로 한국에서 미국 회사를 알아볼 때는, 입사 자체가 목표였을 수도 있다. 일단 인터뷰를 통과하고 오퍼를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입사한 뒤 외국인들 사이에서 섞이다 보면 필요한 영어는 함께 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일단 급한 것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지 들어가서의 일은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다고.


그런데 미국에 와서 하면 늦다. 무슨 말이냐고? 실리콘밸리 빅테크 기업에 엔지니어로 입사했다고 가정해 보자. 직급이 주니어든 시니어든 마찬가지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미국 빅테크 기업에서 안정적으로 일을 하려면 (즉, 레이오프를 안 당하려면) 연차가 쌓이면 쌓일수록 필요한 시기에 진급을 해 줘야 한다. 연차가 쌓인 만큼 책임과 권한이 큰 일을 맡아야 '회사에 내 쓸모'를 계속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터미널 레벨(Terminal Level, 일정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직급, 더 상위 수준의 진급은 극심한 경쟁과 노력이 필요한 단계)까지 오르면, 회사도 직원에게 더 이상 진급을 강제하지 않곤 했다. 그래서 직원도 이후엔 더 이상의 진급을 포기하고, Vest and Rest(일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부여받은 주식과 그동안 오른 고연봉을 즐기는) 모드에 진입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빅테크 기업이 앞다퉈 레이오프를 단행하면서 점차 이런 식의 회사생활은 거의 불가능해지고 있다. 


사실 빅테크 기업에서 레이오프를 할 때 기준은 천차만별이다. 저성과자 일수도, 고연봉자 일수도, 저연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기준이든 간에, 존재감이 있는 직원은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 존재감을 높이는 길은, 필요할 때 늦지 않게 진급을 해야 하는 것이고, 진급을 위해서는 일정 수준이상의 성과를 지속적으로 내야 한다. 그리고 진급을 하면 할수록 요구되는 덕목도 늘어난다. 주어진 일을 잘하는 것을 넘어 점차 소유권(Ownership)을 가질 수 있는 내 일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조직 내에서 내 입지가 중요하다. 프로젝트를 만들고 함께 할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영향력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술적 영향력은 결국 사람의 '말'에서 나온다. 팀원들과 업무를 맞추고, 회의에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설파하며, 상사와 이해 관계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언변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미국 회사에서 말을 잘하려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 그것도 원어민 수준으로 해야한다. 원어민인 동료들에게 영향력을 끼쳐야 하니까



미국 회사에서 사람들과 일을 하다 보면 영어가 자연스럽게 늘거라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엔지니어나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사내에서 실제로 영어를 발화하는 시간은 20%가 채 안된다. 회의에서는 좋은 리스너일 뿐이고, 동료들과 영어로 스몰톡을 나누는 시간은 점심시간뿐, 집에 오면 소중한 가족들과 너무나도 익숙한 한국어로 대화한다. 애들을 재우고 넷플릭스로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고, 막간의 시간에 인터넷으로 찾아보는 것은 고국의 뉴스들이다. 주말이면 타향살이의 애환을 나누려 다른 한국 가족들과 어울리거나, 한인 교회를 방문한다. 


내가 현지화에 대한 노력을 안해서 그렇지 않냐고? 이민 1세대에게는 굴레가 씌워진다. 몸은 미국에 있지만 정체성은 여전히 한국에 있어야 하는. 지금까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문화로부터 절대 벗어 날 수 없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한국 음식을 찾고, 한국 컨텐츠와 소식에 눈이 간다. 그래서 각고의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한 미국이라고 영어에 대한 노출을 극적으로 높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최초미국에 랜딩한 시점의 본인 영어 실력, 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미국 회사에서 은퇴할 때까지 근무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절박함'이 없다. 그토록 갈망하던 미국 이직의 꿈을 이뤄내게 되면 본인도 모르게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미국에 산다해도 영어 노출도 측면에서 한국과 그 다지 차이 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한국에 있을 때 영어 실력을 높이기 가장 좋다. 미국 이주라는 절대적인 목표를 갖고 있는 시점, 그 절박함이 영어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퇴근 전후 영어학원을 다니고, 귀를 뚫으려 미드 스크립트를 챙기고, 회사에 점수를 제출하려 주기적으로 오픽 시험을 보러 다니던 그 시간이, 어쩌면 인생에서 갖게 될 마지막 영어 몰입기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 황금기에 영어 실력을 최대로 끌어올려야 한다. 


현장의 동료들은 절대 배려 영어를 구사하지 않는다. 원어민들이 구사하는 영어로 진행되는 회의에 들어가서, 한국 이직자들은 적극적으로 그 토론에 참여하기는 커녕 그 내용을 따라가기 급급해진다. 따라서 미국에서 일하려면 '말하기'보다 '듣기'가 더 강해야 한다. 영어 스피킹이 서툴러도 대화는 되지만, 일단 대화가 되려면 상대방의 '영어'를 무조건 알아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리스닝 실력을 키우는데 있어 한국과 미국은 완벽하게 같은 조건이다. 미국에서도 청취력을 높이려면 똑같이 미드보고, 뉴스봐야 한다. 한국에서 공부하는 영어가 입시용일 뿐이라고, 미국이 아니라 살아있지 않다고 비관할 필요 없다.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공부한 것이든 결국 내 영어의 일부가 되어준다. 


미국에 오기 전 영어 1:1 회화반을 끊고 1년간 새벽을 깨웠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오픽 AL 등급을 받은 날 기쁜 마음으로 회사 내 인트라넷에 영어점수를 입력했다. 회사는 AL 등급자에게 더 이상 점수 입력을 강요하지 않았다. 거기서 영어에 대한 내 노력은 멈추었고 그것이 곧 내 실력의 상한선이 되었다. 그리고, 미국에 와서는 절박감이 사라졌다는 핑계로 그 노력을 재개하지 않은 채, 영어고자로 긴장감만 넘치는 익사이팅한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 


이것이 미국 이직을 고민할 때, 인터뷰를 통과할 수준이 아닌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목표해야 하는 이유이다. "원어민 수준까지 준비하고 오세요"라는 내 말이 한국에서 영어 때문에 고군분투하고 계실 분들에게 빈정거림이 아닌 진심으로 다다르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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