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일을 더하고 싶으면 집에 가서 밥 먹고 해
<기 발행한 글을 수정, 보완해서 재발행합니다.>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집에 들어섰습니다. 달려오는 딸아이, 기어 오는 아들내미의 웃음 위로 갓 지은 밥 냄새, 된장찌개 끓는 소리가 저를 반겨줍니다. 하루의 피로가 달아났습니다.
“왔어요?”
종일 아이 보느라 피곤했을 아내도 퇴근한 남편이 반가웠는지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저녁 준비를 합니다. 가족과 함께 저녁을 하는 것은 이제 평범해진 일상의 한 장면이 되었습니다. 코비드 19로 재택근무가 시작되면서 ‘물리적인 퇴근’이라는 것은 없어졌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은 여전히 중요한 하루 일과로 남았죠.
미국에 온 뒤로는 거의 매일 집에서 저녁을 해결했습니다. 가끔씩 팀원들과 밖에서 저녁을 하거나, 다른 약속이 있을 때도 있었지만 집밥을 먹을 때가 대부분이었죠. 한국에 비해 외식비가 비싼 이유도 있지만, '가족과 저녁식사'를 당연시하는 이곳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 것입니다.
오후 5시가 넘어가면, 모니터를 끄는 소리, 키보드를 정리하는 소리, 가방을 싸는 소리, 의자를 밀고 일어서는 소리가 주변에서 들려옵니다. 하나 둘 자리를 일어선 팀원들은 제 큐비클을 스쳐 지나며 "먼저 갑니다. 내일 봐요"라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각자의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을 향해서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죠. 그들에게 "오늘 한잔 어때?"라는 말을 꺼내는 건 아주 계면쩍은 일이었습니다.
회사문 밖을 나서면 밖은 여전히 밝았습니다. 처음엔 퇴근길에 햇빛을 쬐는 것이 영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꾀병으로 조퇴하거나 땡땡이를 치는 중2가 된 느낌입니다. 왠지 그 일탈이 주는 은밀한 쾌감과 약간의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이래도 되나?' 하지만, 이내 마음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쯧쯧. 아직도 전근대적인 야근 마인드에 젖어있다니. 이게 당연한 거라고!’
그래. 이게 맞는 것이지? 아무렴. 그렇게 당연한 일에 감사하며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바삐 옮깁니다. 집에서 목이 빠지게 아빠를 기다릴 아이들을 떠올리며.
저녁 식탁 앉을 때마다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그리 거창하지 않지만 아내가 차려준 밥상에는 하루 종일 남편을 기다렸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물론 그 정성에는 '이 밥 먹고 힘내서 저녁 육아에 힘쓰세요!'라는 조금은 부담스러운 뜻도 있었지만 말이죠.
밥그릇 위로 본격적인 수다가 넘나들기 시작합니다. 아내는 둘째에게 이유식을 떠 먹이면서 동네 엄마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쏟아냈고, 저는 간간히 회사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죠. “응. 그래. 그래” 맞장구는 필수적인 추임새였습니다.
어른들의 수다를 듣고 있던 세 살배기 첫째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듭니다. “아빠, 엄마 말은 그게 아니지~” 아내와 전 화들짝 놀라 서로의 얼굴을 쳐다봅니다. ‘아니, 이 아이가 벌써 우리 대화를 알아들어?’ 식탁 위에 한 송이 미소가 피어올랐습니다.
이 평범한 ‘저녁 시간’이 아직까지도 특별한 것은, 한국에서 보냈던 평범하지 않은 저녁때문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주 2-3일은 야근을 했고, 야근은 곧 회사 밥을 의미했죠. 회사 밥은 맛과 영양 모두 훌륭했습니다. 종류도 다양했죠. 매일 한식, 양식, 일식, 중식, 분식 등 16가지가 넘는 메뉴가 무료로 제공되었습니다. 동료들과 구내식당으로 내려갈 때마다, 화려한 음식 사진이 넘실대는 전자 메뉴판을 보며 매일 선택 장애에 빠졌습니다.
실로 야근의 힘은 완벽한 회사 밥에서 나왔습니다. 철저히 계산된 칼로리가 기나긴 밤 시간을 보낼 야근자에게 충분한 영양분을 제공했죠. 그 완벽함은 칼퇴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유혹처럼 다가갔습니다. 퇴근을 하더라도 저녁은 먹고 퇴근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죠. 우스갯소리로 흔히들 말했습니다. "회장님이 공짜로 밥을 주시는 밥, 감사히 먹고 퇴근하겠습니다"라고.
덕분에 집에서 저녁을 먹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아빠를 위해 저녁을 차리는 일도 없었죠. 저녁을 차리는 수고를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저녁은 밖에서 해결되어야 했습니다. 이쯤 되니 야근을 위해 회사에서 저녁을 해결한 건지,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야근을 한 건지 모르는 시간들이 계속됩니다.
그렇게 '저녁'과 '야근'은 한 몸이 되어 '늦은 퇴근'을 합리화시켰습니다. 그 합리화에는 '밥 먹은 것이 아까우니 밥값을 하자', '어차피 퇴근 시간 차도 막히니 2시간 야근이나 해서 교통비나 벌자', '금요일에 일찍 퇴근하기 위해 주중에 근무 시간을 벌어둬야겠다'라는 다양한 심리가 섞여있었죠.
그때는 왜 그리 칼퇴가 어려웠을까요. 정말 '일이 많아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바쁠 때는 낮에 회의도 많아지고, 집중해서 일할 시간은 밤 시간밖에 없었죠. 오늘은 칼퇴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눈을 부릅뜨고 낮시간을 불태워도 허망하게 저녁에 회의가 잡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야근'으로 보냈던 저의 모든 밤들은 결국 '가족'보다 '나'를 우선한 결과였습니다. 가장이 정글에 살아남기 위해 고과나 경력 관리에 힘쓰는 것이 결국 가정을 지키고 가족을 위한 길이라는 참으로 고루한 생각을 갖고 있었죠.
덕분에 두 살짜리 딸내미는 매일 아빠가 없는 저녁 식탁에 앉아야 했습니다. 이유식을 먹을 때도, 조금씩 쌀밥을 먹기 시작했을 때도 딸에게 밥을 떠먹여 주는 어른은 엄마 아니면 할머니였습니다. 밥을 먹고 한참을 신나게 놀아도 아빠는 오지 않았습니다. 딸이 놀다 지쳐 잠들었을 때 불 꺼진 집에 잠만 자러 온 아빠는 딸에게 그저 '집에 놀러 온 사람'이었죠.
야근이 먹고사니즘을 위해였다라지만, 정작 하루 세 끼중 한 끼도 가족과 '먹고'를 하지 못하면 '사니'는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가족과의 만찬'이 내 아이들에게도 영양, 정서, 교육 측면에서 유익하다는 것을 모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지금 눈앞에 닥친 일이 가족과의 밥상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착각이, 그리고 그 착각이 당연시되는 현실이 제 눈을 가렸을 뿐이었습니다. 그 현실에 순응하면서 마음 한편에 또 다른 불안감이 싹텄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내 딸은 아빠와 유대감 없이 자라나고, 나는 점차 '돈만 버는 아저씨가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지금 회사에 이직한 후 처음 며칠간 또 '회사 뽕'에 취했습니다. 이번엔 영어로 된 '뽕'이었죠. 힘겹게 미국에 왔으니 빨리 업무도 익히고 성과도 내야겠다는 조급함이 있었습니다. 논문이나 주요 스펙 문서들도 찾아보며 회사의 주요 제품, 부서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를 빠른 시간 내에 파악하고 싶었습니다. 필요하면 한국에서처럼 야근도 불사할 각오였죠.
그러나, 회사는 이런 제 열정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식사를 할 수 있는 사내 카페테리아는 오후 4시 반이면 문을 닫아버렸고, 회사 밖에서 식사를 하려면 차를 타고 꽤 멀리 나가야 했습니다. 공복에 허기를 달래며 일을 할 정도로 비참해질 수는 없었죠. 회사는 저녁이면 직원을 건물 밖으로 내쫓고 있었던 겁니다. "일을 더 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일단 집에 가. 정 하고 싶으면 집에서 밥 먹고 해"라면서.
"오빠, 이래도 돼?"
매일 정시에 집에 오니 아내도 어색했나 봅니다. 뭔가 불안했는지 오히려 자투리 시간을 내 일을 좀 더하라고 부추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오래가지는 않았죠. 얼마 안 가서 오후 6시만 넘어도 왜 안 오냐고 독촉 전화를 날려대었습니다). 정시 퇴근으로 내몰리는 삶의 웃지 못할 촌극이었습니다.
코비드가 창궐한 후, 근무형태가 전면 재택으로 바뀌면서 아이들과 아내는 제 퇴근을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아이들은 언제든 방문을 열면 아빠를 볼 수 있게 되었죠. 낮에도 "놀아줘 놀아줘"를 연신 부르짖으며 아빠를 찾습니다. "아빠 일하는 중이에요"하고 아이를 달래 되돌려 보내는 것이 새로운 일상이 되었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아니,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가 아침, 점심까지로 이어졌죠.
덕분에 세끼 식사를 오롯이 준비해야 하는 엄마의 수고로움이 그만큼 커졌습니다. 집집마다 엄마들의 아우성, 비명소리가 수시로 들려옵니다.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삼식이'로 전락하기 싫어 저는 오늘도 부엌으로 들어갑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식사를 넘어, 가족을 위해 저녁을 준비하는 일은, 전에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삶이었습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 예나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