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둘레길 트래킹을 가다
'제주는 바다를 보러 오게 됐다가 결국 산으로 향하게 된다.'라는 말을 어디선가 봤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몇 차례 제주도를 가본 나는 문득 한라산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곶자왈도 가보고 비자림, 사려니 숲길 등 제주의 초록빛들을 보고 나서야 그곳들의 시작이 된(화산 폭발) 한라산이 궁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버스 타고 제주도 내를 오며 가며 보던 한라산은, 버스로도 꽤 높게 올라가기 때문에 성판악에서 금방이라도 쉽게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알아보니 아니었다. 성판악에서도 아침 7시 반에는 출발해야 한다. 제주 가면 묵는 플레이스 호텔에도 겨울에는 한라산 눈꽃 트래킹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러니 한라산을 한번 정도는 올라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이번 제주 여행에서는 제주의 숲을 하나 정도 더 가보고 싶었다. '산을 못 가면 멋진 숲이라도 가봐야지'라는 생각이었다. 곶자왈과 비자림, 사려니숲에 대한 좋은 기억도 있고.
확실히 제주의 숲들은 육지에서 보는 숲들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다. 그저 쉬이 걸을 수 있고 발 닿기 좋은 위치에 있는 숲에서도 육지의 산속 깊은 곳에 있을법한 나무가 있다. 짧은 일정에 딱히 거창하게 여행 계획도 세우지도 않던 나는 김포공항에 가서야 숲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검색으로 딱히 맘에 드는 숲을 찾지 못한 채 숙소인 플레이스에 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침대 위에 매거진 [ㅋ](플레이스에서 발행하는 월간 매거진)이 있었다. 저녁으로 떡볶이를 먹으면서 [ㅋ]의 표지를 넘기니, 응??
그래서 가봤다, 한라산 둘레길.
한라산 둘레길은 해발 600~800m의 국유림 일대를 둘러싸고 있는 숲길을 말한다. 일제강점기 때 병참로와 임도, 표고버섯 재배지 운송로 등을 활용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5개로 나눠진 길은 합치면 총 80km 정도 된다. 다녀오고 나서야 한라산 둘레길에 대한 후기를 좀 찾아봤는데 트래킹대회도 종종 열리고 있는 듯했다.
☞ 한라산 둘레길 홈페이지 http://www.hallatrail.or.kr/
북한산 둘레길의 경우 각 코스의 난이도를 상중하로 표기하여 코스를 선택하기가 좋았는데, 한라산 둘레길은 그런 표기는 없었다. 대신, 각 길을 소개한 페이지에서 가족과 함께 하기 좋다거나 하는 말들로 대충 코스의 난이도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검색하다 보니 코스별로 다녀온 분들도 계시긴 하는데 대부분 등산 깨나 다녀본 프로의 냄새가 나는 분들이었다. 나처럼 등산도 잘 안가 본 사람들이라면 후기 검색은 꼭 하고 가시길. 홈페이지에서 길 안내를 보고 숙소가 있는 성산에서 가깝고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수악길을 선택했다. 왜 더 가까운 사려니길을 안 갔냐고?
들어가기도, 나가기도 쉽지 않은 둘레길
사려니길의 경우엔 끝나는 지점에 교통편이 없다고 명시가 되어있었다. 사려니 오름이 신청 후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 그런지 교통편이 마땅히 있는 곳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갔던 수악길도 나오는 길목에 대중교통이 원활한 곳은 아니었다. 이승악오름 쪽에서 나오니 1119번 도로 중간이었고 차는 다니지만 버스정류장은 휴애리 농원까지 가야 있었다. 택시도 안 다니고 카카오 택시도 호출도 안 되는 곳이라 그 정도도 감지덕지하다는 생각으로 휴애리까지 걸어 내려갔었다. 대신, 차를 끌고 오면 차 때문에 시작한 곳으로 다시 돌아 나와야 했겠지만, 나는 버스를 타고 왔으므로 뒤도 안 돌아보고 직진해도 되는 편리함이 있었다.
수악길의 경우에 제주시 방향, 서귀포 방향으로 정류장이 각각 있는데, 제주에서 버스 좀 타봤다는 나는 다음 지도의 추천을 무시하고 버스가 좀 더 자주 오는 서귀포시 부근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제주시 방향으로 올라가는 버스로 환승하면 되니까. 서귀포시 직전의 비석 사거리에서 내려서 길 건넌 후 5분을 기다리고 281번을 타고 '한라산 둘레길' 정류장으로 향했다. (타이밍 요정)
281번을 타고 16 정거장 정도 가야 한라산 중턱으로 갈 수 있었다. 10분 정도 탔을까, 기사님이 안전벨트를 매라고 공지를 하셨다. 앞자리는 아니고 곧 내릴 거라 그냥 있었는데 꼬불꼬불 길을 거침없이 달리는 버스에서 나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창가에 앉았다가 통로 쪽에 앉았다가를 2~3번 반복했다. 토요일이라 서귀포 쪽에 사는 분들이 제주시내로 향하느라 버스는 만원이었는데 한라산 중턱에서 내린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정장 재킷에 치마 입고 말이다.
되도록 운동화와 편한 옷으로 향하자
숲을 간다면 비자림이나 사려니 같이 평평한 길 정도로 생각을 했었다. 출발 전에 어느 숲을 갈지 결정을 해놨던 것은 아니라서 기존의 제주 숲에 대한 경험으로 오피스룩을 입고 가도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다.
결론적으론, 등산을 갈 때만큼의 풀셋으로 아웃도어 옷을 챙기진 않아도 된다. 나는 퇴근하고 온 복장 그대로 2일 내내 단벌신사로 지내는 상태였다. 제주 도심이 아니고선 옷이나 신발을 살만한 데는 마땅하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첼시 부츠에 스타킹, 정장 재킷을 걸치고 가방은 크로스로 매고 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하의가 니트 치마라 신축성도 좋았고 첼시 부츠는 아웃도어 슈즈에서 나온 것이라 보통의 첼시 부츠와 다르게 바닥이 부드럽고 가볍긴 했었다. 신발이 여성 슈즈에서 나온 딱딱한 바닥이었으면 아마 망설였을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운동화, 신축성 좋은 바지를 추천한다. 엄청난 언덕이나 가파른 길이 있지는 않다. 물론, 수악 계곡이나 이끼 낀 바위 길이 있긴 하지만 조심조심 다녔을 때 위험하진 않았다. 하지만, 옷이 옷인지라 옷이나 신발이 상할까 조심조심 다니고 움츠리는 기분으로 다녔던 것 같다. 결정적으로 사진을 찍은 것을 보니 이 산중에 오피스룩은 영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날 강풍이 심해 비행기도 착륙 못하고 20분 동안 제주 상공을 선회하다 겨우 착륙했었던 것에 비해, 토요일 아침은 선선하고 햇빛이 강해 좋았다. 하지만, 산중으로 들어오니 으스스하고 춥다는 느낌이 들어서 갖고 갔던 경량 패딩을 입고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지난 5월, 갑작스러운 강풍에 3일 정도 추운 상태로 있었던 것이 생각나 갖고 갔던 경량 패딩이 도움이 됐다.
한라산 트래킹
차도 들어올 수 있는 큰길을 지나 제대로 산길을 들어와 처음 만난 길은 이끼가 가득 낀 돌 밭에 나지막한 오르막이었다. 이끼 낀 돌을 밟으면 미끄럽겠지만 밟고 올라갈만한 땅길 도 있어서 오르는 게 힘들지 않았다. 계단 오르듯 편히 오르는 길은 아니다. 수악길 대부분이 그랬다. 북한산 둘레길이 대체적으로 잘 닦인 길이었다면, 수악길은 산악길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버섯을 채취하러 다닌 길이었다고 생각하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갈래길 같은데선 어디로 가야 하나 싶은데 나무 중간중간을 기둥으로 노란 줄을 묶어놔서 그 줄만 따라가면 되고 리본으로 묶어놓기도 해서 길을 헤매진 않았다.
옷과 신발, 가방이 상할까 조금은 걱정됐지만, 나름대로 스릴은 있었다. 준비 없는 상태에서 이런 트래킹을 하고 있는 것이 마치 진정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만족감이 커졌다. 무엇보다 새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잔잔히 들려 가을을 고즈넉하게 즐기기 좋았다. 사람은 못 만나도 다람쥐는 많이 만났다. 보니 주변에 도토리나무가 참 많았다. 도토리 점심 가지고 소풍을 가나...?
꿩 대신 닭이란 말이 있다. 이번 한라산 둘레길이 그랬다. 한라산 등반 대신 둘레길을 돌아보는 것. 그런데 의외로 좋았다. 등산을 성인이 되어 가본 적도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움직이는 걸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래서인지 한라산은 궁금했다. 곶자왈처럼 기이하고 사려니처럼 고즈넉한 자연을 지니고 있는 제주의 중심에 있는 산엔 어떤 자연이 펼쳐져 있을지 말이다. 등산을 예습하듯 걸어본 둘레길은 걷는다는 느낌보단 트래킹에 가까웠지만 이도 저도 아닌 나의 경험과 성향에는 딱이었다.
한라산 둘레길, 혼자 가도 될까?
북한산 둘레길도 사려니숲길도 혼자 갔던 터라 한라산 둘레길도 별생각 없이 혼자 갔었다. 산 중이라서 그런지 LTE도 잘 터지지 않았지만, 나는 친구들한테 카톡이나 SNS에 한라산 둘레길에 있음을 알리긴 했었다. 혼자 가면 페이스를 맞출 필요도 없고 내가 쉬고 싶고 사진 찍을 때 찍고 싶은 순간을 위해 기다리기도 좋았다. 길 자체가 조심만 하면 위험하진 않았으며 이정표도 잘 되어있어서 위급상황 시 내 위치를 알리기도 어렵지 않았다.
다녀와서 한라산 둘레길 홈페이지를 보니 가급적 둘셋 이상이 가길 권장했다. 근데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흔적 자체가 있지 않은 곳이라 사고가 생기면 도와주기도 힘들 것 같았다. 주말 낮임에도 불구하고 나도 이승악오름 부근에서 둘레길을 나오려 했을 때가 돼서야 내 앞에 두 사람이 지나가는 걸 봤을 뿐, 둘레길 내내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승악 오름을 오르지 않고 돌아 나왔는데 나오는 길을 잘못 들었는지 평평하고 넓은 길이었지만, 낙엽을 잘못 밟으면 몸이 기우뚱거릴 정도의 구덩이가 있는 곳도 있었다. 건너편에 작은 개울 하나만 건너면 차 지나다니는 길인 것 같아서, 지도를 보며 없는 길을 찾아 개울을 건너 건너편으로 왔다. 사유지인 농장의 중간이었는데 철문을 넘어 겨우 나왔었다.(다행스럽게 철문에 자물쇠가 안 잠겨 있어서 문을 열 수 있었다) 길 양쪽으로 들판에 소가 있었지만, 도로로 간혹 차가 지나다녀 그제야 저곳을 탈출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이승악오름 쪽에서 나오면서 꺾어서 나오는 길이 있는데 제대로 인지 못하고 직진한 것 같았다. 혼자 다니면 이런 판단의 오류로 나처럼 헤맬 수가 있을 것 같다. 다른 둘레길들과 다르게 사람의 손길도 적고, 사람도 별로 없는 길이니 가급적 다른 사람과 같이 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갑작스러운 트래킹이었지만, 가는 것이 망설여지진 않았다. 장비나 옷 같은 것이 준비가 된 상황이 아니었지만, 마음은 오래전부터 갈 준비가 되어 있던 것 같다. 일상에서도 모험한다는 생각으로 다녔던 것이 도움이 되었을까? 항상 직진을 해서 출근했다면 오늘은 조금 일찍 출근해서 왼쪽으로 가서 처음 가보는 길을 걸어보거나, 점심 후의 산책길도 이길도 저길도 다녀보고 걷는 걸 좋아하게 만들어놓은 그런 모험의 습관들 말이다.
어떤 사람이 한라산 둘레길을 가면 즐거워할까? 엘리베이터가 만원일 때 5층 정도는 계단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한라산 둘레길 도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또 걷는 걸 좋아하며 계단이 싫지 않는 사람, 항상 먹던 메뉴가 아닌 다른 메뉴도 먹어보는 약간의 호기심과 약간의 모험심이 있는 사람에게도 좋을 것 같다. 일상에서도 작은 모험심이 유지되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걸 접했을 때 후회보단 만족을 더 하지 않을까? 아직 가을이 다 지나가진 않았다. 한반도에서 가장 늦게까지 가을이 있을 제주도에서의 모험에 당신의 주파수가 닿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