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을 멈추고 노랗게 펼쳐진 논 앞에 차를 멈추었다. 차에서 내려 잠시 황금들녘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이논에서 어린 조카를 데리고 새를 보았던 시절이 떠올랐다. '훠이 훠이' 새를 모는 소리에 '퍼드득' 새들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벼가 익어가는 논 앞에 서니 어느해 가을 벼를 베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진다. 잠시 시골에 들린 추석 무렵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를 찾아 이논에 왔었다. 그해 가을 벼를 베던 아버지의 모습은 건강하신던 때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 논 끝에서 아버지는 허리를 숙인채 열심히 벼를 베기 위해 낫질을 계속하고 계셨다.
나이가 드셔도 언제나 건강하게 생각되었던 아버지였다. 그시절 건강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이 논에 서니 벼가 익어가는 모습과 함께 떠오른다. 말이 없으셨던 아버지, 이웃 사람들에게 참 좋은 사람이셨던 아버지, 자식들에게 다정한 말이라고는 건넬 줄 몰랐던 무뚝뚝한 아버지, 평생 일밖에 모르며 사셨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잠시 벼이삭처럼 고개를 숙여본다. 눈을 감고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본다. 평생 쌀을 얻을 수 있는 논 한 평을 더 갖기 위해 열심히 땀 흘리신 그 수고를 떠올려 본다. 처자식 굶기지 않으려고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소처럼 일하신 아버지의 헌신에 감사의 묵념을 드린다. 가을들녘 노랗게 익어가는 벼이삭들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알알히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