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 생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약산진달래 Dec 18. 2021

짓밟힌 눈길처럼 변해버린.....

눈 내린 다음날 무거운 머리를 안고 집을 나섰다. 눈이 내려 쌓인 길을 걸으니 살얼음판 길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다가 잘못 땅을 디디기라도 한다면 미끄러지기 딱 십상인 그런 길을 걸어간다.


나무 위에 쌓인 하얀 눈더미에 아이들이 만들어놓은 작은 눈사람이 눈에 띈다. 아빠의 호위를 받으며 놀이터로 나가는 아이의 손에는 노란 집게가 하나씩 들려있다. 그래서인지 길거리마다 하얀 오리 형제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보인다. 올해도 눈은 내리고 아이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눈을 모아 눈사람을 만들며 하얀 오리 형제들을 수없이 탄생시키고 있다.


무거운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모처럼 눈 내린 산길로 들어선다. 산 입구로 올라가는 대나무 계단에 이미 이 길을 지난 간 사람들로 인해 지전분해 졌다. 하얀 눈에 밟힌 발자국들로 인해 흙탕 빛으로 변해간 눈길이 마치 내 마음 같아 마음이 아린다. 그 길을 한걸음 한걸음 밟아가며 내 마음의 지저분한 길들을 걸어본다. 언덕을 올라가는데 숨이 턱턱 막혀온다.


인정받지 못해서, 도움받지 못해서, 감당할 수 없어서 그럼에도 혼자서 견뎌내야 하는 하루하루에 숨이 턱까지 차 버렸는지도 모른다. 과거 첫눈처럼 눈부신 하얀 길 같았던 나의 마음도 이제는 바람에 눈발이 흔들렸고 먼지가 쌓이고, 사람들이 짓밟고 지나간 흙탕길로 범벅되어 지저분해져 버렸다는 것을 안다. 흙탕길 살얼음처럼 얼어버린 눈길에 애써 감추고 있는 내 마음을 들킨 것만 같다.


바람이 싸아하다. 알싸한 차가움이 맨살에 부딪쳐온다. 머리끝까지 쭈뼛해진다. 먹먹한 정신이 사르르르 녹아든다. 땅으로 내려앉은 눈은 벌거벗은 나무에 하얀 나뭇잎을 만들어낸다. 하얀 나비라도 잠시 앉은 듯하여 살짝 다가섰더니 허망하게 사르르 날아가버린다.


바람 따라 날아가는 눈발을 쫓아 눈길이 머문 곳에 하늘이 열려있다. 나무 사이로 열린 하늘에 무거웠던 마음이 파도친다. 눈이 하늘을 따라 나뭇잎을 헤치고 간다. 어지러운 생각들은 땅으로 내려앉고 산만한 마음이 고요해진다.


가는 길은 이미 흙탕길이 되어버렸다. 발은 헛발질에 미끄러질뻔했다. 생각은 바람에 눈발처럼 흩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가닥 붙잡은 정신마저 미끄러지면 안 된다. 한발 한발 조심히 걸어가자.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있고,  묵묵히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빠의 호위를 받고 쌓인 눈을 찾아 나선 아이처럼 손에 든 노란 집게로 아직은 똑같은 눈사람을 찍어낼 수 있어야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을빛으로 물들어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