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키우자고 계속해서 엄마에게 졸라대던 아이를 알고 있다. 자신에게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지 몰랐다가 우연히 친구네 집에서 고양이를 안았다가 두드러기가 올라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고양이를 키우자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나에겐 고양이털 알레르기는 없지만 다른 알레르기가 있었다.
나에게는 계란 알레르기가 있다. 물론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것은 아니다. 계란을 먹으면 영락없이 체하고 만다.
라면을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할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라면만 먹으면 체하는 것이 아닌가? 무엇 때문에 체하는지 몰랐는데 바로 라면을 먹을 때면 풀어진 계란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 뒤로 라면 국물에 떠있는 계란은 절대 먹지 않았다. 라면을 사 먹을 때면 계란을 빼주세요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김밥에 넣어진 계란을 먹을 때도 체했다. 그래서 내가 먹는 김밥은 언제나 계란이 빼고 먹었다. 계란을 빼고 먹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빼놓은 계란 덕분에 부족한 단백질을 더 채울 수 있다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오징어를 먹어도 체했다. 그래서 영화관에 갈 때면 늘 쥐포만 먹었다. 영화를 같이 보는 친구들이 오징어를 먹을 때면 군침이 돌았지만 참아야만 했다. 먹고 싶은 유혹에 오징어 다리 하나라도 뜯었다가는 바로 체기가 올라와 곤욕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사람마다 알레르기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누군가는 동물에게 혹은 식물에게 그리고 음식 알레르기까지 말이다.
그런데 나는 사람 알레르기도 있었다. 특히 어른 알레르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 학생들을 편애하던 선생님이 시초이다. 직상 상사 알레르기도 있었다. 일을 벌여놓고 지시만 하고 그 일을 해결해야 하는 몫이 나에게 돌아왔을 때는 더욱 심한 알레르기가 올라왔다. 얼굴을 보기 싫다든지, 목소리가 듣기 싫다든지, 함께 있는 것조차 역겨워지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에 대한 알레르기가 얼굴에 표정으로 드러나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은 계란 알레르기도 오징어 알레르기도 사람 알레르기도 사라진 지 오래다. 물론 가끔이 몸이 약해질 때면 내가 가진 알레르기들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러나 잘 다스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연스럽게 소화를 해내고 있다.
알레르기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나의 욕구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양이 알레르기를 가진 친구는 갖고 싶고 만지고 싶은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나의 경우는 먹고 싶은 것을 참아야만 한다. 그러나 알레르기가 사람에게 나타나면 큰일이다. 자신만 포기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되고 결과적으로 나쁜 영향력은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자신의 알레르기가 무엇인지 먼저 잘 파악해야만 한다, 알레르기가 올라오는 것은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해가 되는 사람과는 멀리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 사람이 직장 상사이거나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면 피할 수 없다. 그럴 땐 최대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자세가 필요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