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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본캐를 버렸다

by 약산진달래

현대 사회는 본캐를 가지고 있지만 새로운 부캐를 하나씩 더 생산해 내는 시대이다. 연예인들만 해도 같은 프로그램에서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모습을 내걸고 방송한다. 어떤 이들은 sns 개정을 운영하며 본캐와 부캐를 나누어 활동한다. 자신 안의 또 다른 모습 새로운 부캐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나에게도 여러 개의 캐릭터가 존재한다. 현재 나의 본캐는 어떤 모습인가? 생각해 보니 과거의 나의 본캐는 결코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다.

백과사전만큼 두꺼운 신학서적을 보고 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고민했다. 사람들을 위해서 긍휼의 마음을 안고 기도에 힘썼다. 어떻게 하면 쉽고 더 재미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아이들에게 가르칠까 연구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고민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이 가장 나다운 모습이었다. 이 모습은 나의 본캐였다.

내가 본캐의 자리에서 떠난 지 5년이 넘었다. 처음 몇 년간은 사람들을 만날 때 나의 본캐가 언제나 먼저 작동했다.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기도해 주었고, 안타까운 사연을 들으면 함께 아파했다. 잘못된 길로 갈 때는 그들을 바른길로 인도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를 통해 위로받기도 하고 나를 통해 돌아서기도 했지만 어떤 일들은 나의 오지랖이 되기도 했다.


나의 본캐가 작동해 쓸데없는 참견을 한 경우는 이렇다. 엄마의 재활을 돕기 위해 병원에 입원을 하고 얼마 안 있어서 있던 이야기다. 다리를 저는 예쁜 아가씨가 입원을 했다. 그 아가씨에게 갓 뇌졸중으로 쓰러져 재활 중인 아저씨가 다리를 절면서도 술을 마시러 가자고 수작을 거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그 아저씨에게 그러지 말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아저씨 그럴 시간에 운동을 더 하세요"ㅣ
이일이 있기 전까지 아저씨와는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그 뒤로 아저씨는 나를 무시하고 다녔다. 아주 못마땅한 얼굴로 말이다. 네가 왜 남의 사생활에 참견하느냐는 식이었다. 나중에 알고 봤는데 그 아가씨는 아저씨를 술을 마시러 다녔고 친하게 지내는 것을 종종 보게 되었다. 어떻게 알게 됐는지 아저씨의 부인의 부인이 병원을 찾아와 생난리를 친 적도 있다. 그런데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이 있다. 그 아가씨가 아저씨가 자신에게 찝쩍대는 것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의 오지랖이 맞았다.



내가 가지고 있던 본캐를 떠나니 호칭부터 달라졌다. 사람들은 나를 아줌마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는 간병인이 되었다. 간병을 직업으로 갖는 사람들을 보면 연령대가 다양하다. 그러나 한결같이 비슷한 점이 있다. 그것은 세상에서는 더 이상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를 찾아 돈을 벌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24시간 환자를 돌보며 병원 간이침대에서 먹고 자고 바깥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아간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 환자를 돌보며 자신의 인생을 버린 사람들이다. 아니 그 삶이 자신의 인생이 되어버린 사람들이다. 처음 엄마를 돌볼 때만 해도 이 삶은 나의 부캐였다.

본캐의 삶을 내려놓았지만 내가 하던 사역의 자리를 떠났을 뿐이었다. 본캐가 어떤 모습인지 알려주는 물건을 버리지는 못했다. 이삿짐 속에 그대로 따라왔다. 신발도 옷도 책도 ... 그리고 나의 신념도 ...


본캐를 벗어나 한해가 지난후에야 옷을 여러 벌 정리했다. 그러나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 옷걸이에 걸려있다. 신발도 마찬가지다. 단 한 번도 신은 적이 없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신학서적은 어떠한가? 박스에 담긴 채 그대로 구석에 방치되어 있다.
3년이 지나도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 있다면 정리하자 라고 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까지 본캐를 상징하는 물건들은 단 한 번도 선택받지 못한 채 그냥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교회를 떠나며 사역자들에게 전집들은 이미 나눔을 했지만 꺼내놓고 보니 그 무게가 느껴진다. 책을 당근 마켓에 팔아야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눔으로 올렸더니 어느 신실한 당근님으로 가져가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책이 더 많은데 가져가실래요?"라고 했더니 당근이라며 내가 가진 신학서적을 모두 가져갔다. 다행히 무거운 책을 보내며 서운한 마음 일도 없이 마음이 가벼웠다. 수십 년간 쌓아온 나의 본캐를 이렇게 가볍게 단 한순간에 쉽게 정리했다.



지금 나는 다양한 부캐들로 활동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상품 리뷰를 하는 블로거이기도 하다. 엄마를 돌보는 요양보호사이기도 하다. 거기에 아이도 양육하고 있다. 유튜브 기도 채널도 운영 중이다. 심심풀이로 식물도 키운다. 캘리그래퍼이기도 했다. 본캐는 버렸지만 나만의 부캐들를 하나씩 늘려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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