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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약산진달래 Mar 22. 2024

종소리가 울리면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창세기 9:16


차안으로 들어온 봄볕이 따사롭게 느껴지는 오후. 차는 서서히 마을 어귀로 들어서고 있다. 산이 울타리를 두르듯 작은 마을을 감싸고 멀리 다도해의 섬이 보이는 곳. 바로 내가 태어난 고향이다. 산 아래 가물가물 아지랑이가 연둣빛으로 흔들거리고, 겨우내 팽개쳐졌던 밭은 이제 땅을 갈아엎고 씨앗을 뿌릴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어린 시절 사람들로 번화했던 상점가는 이제 적막만 감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맑은 하늘에 우뚝 솟은 종탑이 보였다. 어린 시절 그토록 나를 불러대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댕댕땡'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새벽에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마을 사람들은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어린 나는 교회 종을 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예배를 알리는 종을 처음 치던 날, 온몸은 긴장과 떨림으로 경건했었다. 종에 매달린 긴 줄을 작은 손으로 잡고 잡아당기면 그 줄은 어린 내가 당긴 힘만으로 흔들리며 ‘댕 댕’ 소리를 냈다. 그 신성한 성물을 울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었다.

종소리가 울리면 금요일 저녁 구역모임, 토요일 저녁 학생 예배, 일요일 주일학교, 아직 중학교 1학년밖에 안된 커트머리를 하고 바람만 불어도 꺄르르 웃던 나는 "청소해라" 쩌렁쩌렁 울려퍼진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교회로 향했다. 교회에 열심이었던 동네 친구들과 전도사님을 따라 언덕을 넘고 공동묘지를 지나 칠흑 같이 어두운 밤길을 오직 앞만 겨우 비추는 후레쉬 불빛에 의지해 구역예배를 드리러 갔다. 토요일 저녁이면 학생 예배를 마치고 작은 단칸방 사택에 모여 명화극장이 끝나도록 텔레비전을 보다가 빛도 없는 까만 밤길을 동네언니들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학습을 받기 전날 밤 식구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이불 속에서 쪽지에 써놓은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을 속으로 외웠다. 일요일이면 어린 내가 주일학교 선생님이 되어 어린아이들을 가르쳤다. 중1 여름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주체한 수련회에서 자연스럽게 나는 헌신의 기도를 드렸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너는 하나님 옆에 꼭 붙어있을 거야. 목회자가 되지 않아도 사모가 되었거나 교회 선생님이 되어있을 거야 "

헌신의 기도를 드린 어린 나에게 박 전도사님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언약처럼 가슴에 깊히 새겨졌다. 고향을 떠난 후에도 어디를 가나 나를 따라다녔다. 내 멋대로 살고 싶었던 청소년기를 지나.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청년기에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던 말씀이다.

종탑 옆으로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한 모습의 네모반듯한 돌들로 지어진 작고 아담한 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어린 시절 내가 다닌 교회다. 이 먼 낙도까지 내려온 선교사들의 피땀이 서린 곳, 백 년 이상의 선교역사를 자랑하는 장로교회다. 몇 해 전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교회 건물이 도로 옆에 지어졌지만 고향 집에 올 때면 내 눈은 언제나 내 영혼의 고향을 바라본다.

"너는 하나님 옆에 있을 거야"

노아가 무지개가 뜰 때마다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듯 내 영혼의 고향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나 사이의 언약을 기억해 낸다. 지금 나는 목회자도 선교사도 주일학교 교사도 아니지만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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