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그리고 전도사가 되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창세기 45:7~8)
나는 늘 생각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라고.
처음 중국을 떠날 때, 나는 대만으로 가서 중국어에 능통한 어린이 사역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한국에서 어린이 사역자로 쓰셨다.
나는 목회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 길을 피하고 싶었다.
회개 기도를 하고, 봉사활동을 하고, 선교사로 헌신도 했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목회자가 되는 길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길을 준비해 두셨다.
대만 어린이전도협회 팀이 단기선교로 중국을 찾아왔다.
북경 인근 지역에서, 비밀리에 한족 주일학교 교사 강습회가 열렸다.
중국 경찰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우리는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새벽과 한밤중을 이용해 이동했고,
강습회가 열린 연립주택 같은 아파트에서는 3박 4일 동안 단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대만 어린이전도협회 단기팀이 오기 전부터 중국어 찬양집을 만드는 일을 도왔다.
그리고 강습회에서는 진행을 맡아 도왔다.
대만 어린이전도협회 팀원들은 중국의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머무는 동안 단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나에게 도전이 되었다.
유창한 중국어로 복음에 목마른 중국 주일학교 교사들을 가르치는 모습,
새벽부터 일어나 기도하고, 밤 늦게까지 가르치고,
그리고 무릎 꿇고 밤을 새워 기도하는 모습.
그들은 중세의 교부처럼, 경건한 신앙의 증인들이었다.
나는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나는 언어의 한계를 느꼈다.
중국어로 성경공부도, 제자훈련도, 교사훈련도 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다음 사역지를 대만으로 정했다.
대만 어린이전도협회에서 훈련을 받을 계획을 가지고, 나는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바로 대만으로 떠날 수 없었다.
선교단체에서 중국 선교부 간사가 필요했다.
나는 단기선교팀을 모집하고, 훈련하고, 파송하며, 선교 보고대회까지 맡게 되었다.
그러던 중, 교회에서 담임목사님께서 나에게 주일학교를 맡아보라는 제안을 하셨다.
이미 교사로 섬기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주일학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문제는 호칭이었다.
나는 ‘간사’로 불러주길 원했지만,
담임목사님은 “선교사로 지냈으니 전도사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하셨다.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전도사가 되었다.
성도들과 아이들은 나를 볼 때마다 **“전도사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는 그 호칭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신학을 하지 않았다.
나는 성경 지식도 부족했다.
어린이 설교집을 사서 설교를 했고,
주일학교 공과도 어려웠다.
그렇게, 성경을 전문적으로 배울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학도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의 문을 두드렸다.
어쩌다 보니, 나는 목회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본과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원에 온 젊은이들,
오랜 선교 생활을 하다가 입학한 선교사님들,
은퇴 후 신학을 공부하는 분들.
학생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복음주의 신학과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나도 그 무리에 섞여 신학도가 되었다.
그렇게 즐겁고 자유로웠던 4년이 흘렀다.
(학내 사태로 인해 1년을 더 다녔다.)
한편, 교회에서 주일학교를 섬긴 지도 5년이 흘렀다.
내 마음은 여전히, 부르심만 있다면 선교지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왜 나를 한국에 머물게 하셨는지 깨닫지 못했다.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
나는 새로운 사역지를 맡게 되었다.
그것은 **엄마와 아기가 함께 예배하는 ‘영아부’**였다.
사역을 하면 할수록, 나는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용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훈련을 시키셨구나."
"이때를 위함이었구나."
돌이켜 보면,
내가 받은 모든 훈련은 결국,
"나는 준비되고 있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자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