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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의 삶

by 약산진달래

1995년, 중국의 외국인 거주 제한 정책

1995년, 중국은 외국인의 거주지를 제한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외국인들은 주로 중국 정부가 지정한 특정 지역이나 고급 아파트 단지에서만 거주할 수 있었다.

보통 외국인들은 야윈춘(亚运村) 대사관 주변 지역과 화자띠(华嘉大厦) 같은 특정 고급 아파트 단지에서 거주할 수 있었지만, 이 지역의 임대료는 상당히 높아 쉽게 거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외국인들은 거주 제한 지역 밖에서 거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불법 거주로 간주되어 공안(公安)의 단속 대상이 되었다.

알리좡에서의 생활과 첫 이사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 숙소를 바로 구하지 못해 김 선생님 댁에서 한 달 정도 머물렀다. 이후 유아원 개원과 함께 알리좡(安立庄)에서 거주하게 되었는데, 이곳은 외국인이 정식으로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공안의 단속 대상이었지만, 임대료가 저렴했고 학원가 근처에 있어 학생들도 기숙사가 아닌 집을 얻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알리좡에서 1년 정도 거주하게 되었다.

유아원 숙소로의 이사와 또 다른 제약

알리좡에서 1년을 보낸 후, 야윈춘에서 처음 시작한 북경 유아원이 모태가 되어 북경 한국 병설유치원으로 새롭게 시작하며. 자체 건물을 임대하여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때 중국내 유아원을 임대하여 운영하게 되었고, 유아원 내에 선생님들이 머물 숙소도 마련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곳 역시 외국인이 거주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는 점이었다.

공안에서는 예고 없이 단속을 나왔고, 만약 단속에 걸릴 경우 유아원은 물론 그곳에 거주한 외국인 선생님들까지 모두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위험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퇴거 명령과 나그네의 삶

어느 날, 외국인들이 정부가 지정한 거주지에서 살지 않을 경우 벌금과 퇴거 명령을 받게 된다는 소식이 돌았다. 유아원 기숙사에 살던 선생님들에게 비상이 걸린 것이다.

이때 진 선생님에게는 4살 된 딸이 있었고, 남편인 장 선생님은 사업차 한국에 가 있는 상황이었다.

어두운 밤, 진 선생님과 나는 어린 지*의 손을 잡고 중국의 골목을 하염없이 서성이며, 어디에서 머물러야 할지 고민했다.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거리에서,

우리는 한 몸 의탁할 곳이 없어 서글픔을 느껴야 했다.

그 순간, 나는 이국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간다는 것의 서러움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또다시 반복된 이사, 그리고 깨달음

그 이후에도 몇 번의 이사를 더 해야 했다.

유아원을 그만두고 언어연수를 할 때는 다행히 대학 내 기숙사에서 머물며 거주에 대한 불안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언어연수를 마친 후에는 진 선생님이 이사한 둥좡(东庄)으로 이사하여 한동안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날, 어두운 거리를 헤매며 나는 한 가지 다짐을 했다.

"불필요한 짐을 줄이며 살자."

나는 책을 좋아했고, 책장에 책이 가득 꽂혀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사를 하면서 짐을 싸고, 옮기고, 다시 풀어야 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방식임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처럼 이삿짐 센터가 이사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셀프로 모든 것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사할 때 가장 무거운 것은 책과 가구였다.그 후유증 때문인지, 지금도 내 집에는 책이 별로 없다. 물론, 가구도 거의 없다.

중국의 외국인 거주 제한 정책 변화

중국 내 외국인 거주 제한 정책도 경제 개방과 도시 발전에 따라 점진적으로 완화되었다.

베이징의 외국인 거주 제한은 2003년 10월에 완전히 철폐되었으며,지금은 외국인들이 어디서나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나그네의 삶과 자유

그날 밤, 나에게 흑암과도 같았던 그날의 기억

이 땅에서의 삶이 결국 나그네의 삶임을 철저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지금도 마음만은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안주하는 삶은 어느새 나를 붙잡고, 다시 짐을 늘려가고 있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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