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골목의 가로등 아래서

전봇대, 전깃줄, 그리고 사라진 풍경의 결

by 깊고푸른밤




(이미지출처 : 구글)


빛만 남고, 삶의 결은 보이지 않게 된 골목.
나는 이 문장으로 겨울밤을 떠올린다.


골목길을 어슴프레 밝히던 가로등,
그 위를 엉켜 지나가던 전봇대의 전깃줄,
그리고 그 전봇대에 겹겹이 붙어 있던
구인광고와 전단지들.


지금은 구조도, 소란도, 결도 조용히 지하로 숨었다.


둥근 빛의 원이 만들어내던 겨울의 온도

가로등 아래엔
항상 둥글게 떨어진 빛의 원이 있었다.
노란빛이 어둠과 섞여 만들어낸 그 작은 원은

겨울밤의 공기를 잠시 데워주는 하나의 온도였다.


그 원 안으로 눈송이가 들어오면
갑자기 형태가 또렷해지곤 했다.
공기가 살아 있는 듯한 착각을 주던 순간들.


그 둥근 빛 하나만으로도
집까지 남은 마음의 거리(距離)가
조용히 좁혀지던 시절이었다.


전봇대를 따라 얽히던 전깃줄의 흐름

가로등빛을 가르며
전봇대 위에는 수십 개의 선이
다른 방향과 다른 속도로 얽혀 지나갔다.


굵은 선, 가는 선,
중간에 꺾였다 다시 이어지는 선들.
그 혼잡함이 오히려 동네의 생기를 만들었다.


그 선들은 집집마다 이어져

밥 짓는 불을 켜고,
밤늦게도 켜져 있는 방을 비추고,
텔레비전의 잔광까지 이어주었다.


지금은 그 선들이 모두 지하로 내려가며
하늘은 깔끔해졌다.
대신 삶이 흐르던 작은 흔적들은
표면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이미지출처 : 구글)


겨울바람이 흔들던 것은 늘 전깃줄이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보다 먼저 움직이는 건
언제나 전깃줄이었다.


가늘게 떨리는 선들이
가로등빛을 흔들리게 만들고
그 미세한 떨림이
"아, 오늘 밤은 더 춥겠구나"
하는 예감을 주었다.


풍경이 예고했던 계절의 감각도

이제는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전봇대에 빽빽이 붙어 있던 전단지들

전봇대의 표면은
동네의 살아 있는 게시판이었다.


배관 수리 전화번호,
이삿짐센터, 학원 안내,
찾습니다, 급구, 급구, 급구.
비에 번진 종이가 얼어붙은 날도 있었다.


전단지가 많을수록
그 동네는 사람이 오가고
일이 생기고
누군가가 누군가를 찾는
살아 있는 동네였다.


지금은 종이를 붙일 자리도 없고
그런 기척들 역시 표면에서 지워졌다.


전깃줄 위 참새들도 더 이상 머무를 곳이 없었다

겨울이면
전깃줄 위엔 늘 참새들이 모여 있었다.
깃을 부풀리고 서로 가까이 붙어
가로등 아래 조그만 소란을 만들었다.


그 참새들이 떠난 건
전깃줄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골목이 참새를 붙잡아두던
작은 온기를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설명되지 않는 상실은
이런 순간에 가장 크게 느껴진다.


골목 끝에서 들려오던 개 짖는 소리

가끔은
골목 끝 집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차가운 공기를 깨뜨렸지만,
이상하게도 골목이 아직 ‘살아 있다’는
하나의 징표처럼 느껴졌다.


가로등 아래 흔들리던 전깃줄,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들,
참새가 앉아 있던 선들 사이로
그 소리가 천천히 스며들었다.


지금은 그 소리마저
어디로 흩어졌는지 알기 어렵다.
풍경이 조용해지면서
소리도 함께 숨어버렸다.



Epilogue

가로등은 골목을 비추고,
전깃줄은 삶을 이어주고,
전봇대는 동네의 하루를 붙잡아두었다.


깔끔해진 도시에서
이제는 그 흔적 대부분이 숨게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겨울밤
불 꺼진 아파트 단지를 걸을 때면
그 시절 골목이 문득 겹쳐 보인다.


눈이 내릴 듯한 공기,
가로등 아래 짧아지던 그림자,
전단지의 잉크가 얼어 있던 표면,
전깃줄 위에서 떨리던 참새들의 작은 울음.

그리고 골목 끝에서 들리던 개 짖는 소리.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전봇대나 전깃줄이 아니라
그 아래서 천천히 흐르던
사람 사는 결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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