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부엌, 찬장에 남아 있던 온도

오래 사용된 물건이 품고 있던 겨울의 숨

by 깊고푸른밤

(이미지출처 : unsplash)


겨울이 되면 부엌의 온도가 유난히 선명해진다.
아직 햇빛이 닿지 않은 시간,
찬장은 언제나 조금 더 차갑고 조금 더 고요했다.
유리컵은 표면까지 겨울 공기를 품고 있었고,
금속 그릇들은 손끝에 닿기 전부터 온도를 예고하는 듯했다.


사물들은 늘 사람보다 먼저 계절을 드러낸다.
식기를 들어 올릴 때,
그릇이 살며시 부딪히며 내는 작은 금속음이
겨울이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온 첫 신호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부엌에 서 있다 보면,
가끔 오래된 장면이 천천히 떠오르곤 했다.
딸이 결혼을 앞두고 찬장을 열어
엄마가 쓰던 그릇을 하나씩 꺼내던 모습.
접시를 받쳐 들 때 조심스럽던 손끝,
유리컵을 한 번 더 닦으며
잠시 멈춰 있던 그 순간.
그런 장면은 부엌의 공기보다 더 조용한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식기라는 건 본래 그런 식으로 쓰이는지 모른다.
한 사람의 온도가 사라지기 전에
다른 손의 온도가 이어 붙고,
말로 남지 않은 기억이
사물의 표면을 통해 조용히 세대를 건너가는 일.


가끔은 이런 생각이 흐릿한 웃음을 만들었다.
유리컵 하나 꺼내는 일이
집 안에서 가장 은근한 전승(傳承)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누구도 의식하지 않지만
겨울에 가장 오래 남는 건 늘 이런 사물들이다.


오늘 아침 부엌에서도 그런 기척이 있었다.
찬장에 반사되던 작은 빛,
열렸다 닫히는 문이 만들던 미세한 공기,
손끝으로 전해지던 금속의 차가움.
아무도 보지 못한 사이
겨울은 그렇게 사물들 사이를 조용히 지나갔다.


Epilogue

이 글은 내가 직접 겪은 이야기라기보다,
겨울 부엌에서 잠시 머물던 공기가 떠올리게 한 장면에 가깝다.
각자의 집마다 풍경은 다를 테지만,
읽는 분의 하루에 작은 온도 하나 남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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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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