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하시는 부모님 대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주로 나와 언니를 맡아 키워주셨다. 아침에 깨워서 학교 갈 준비를 시켜주시고 저학년 때까지는 교문 앞까지 데려다주셨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집에 혼자 있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항상 함께였었다. 혼자 있어본 경험도 적고 언제 어디서 쓰러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병은 자꾸 나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계속 더, 더, 더 위축되는 굴레에서 벗어나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터닝포인트가 필요했다.
준비과정은 철저히 비밀로 진행했다. 서류와 면접에서 통과를 하고 훈련소에 입소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1달 동안 훈련소에 가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미리 가족들이 알게 된다면 반대하고 그걸 이겨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입소 직전까지 숨기고 싶었다. 입소할 때, 해외 활동 중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한 안내와 가족의 동의를 구하는 서류에 서명을 받아가야 했었다. 부모님께는 그냥 필수적으로 받는 서류니깐 얼른 사인하라고 하고 가져갔었는데 시간이 흐른 후 이때 내 행동이 미숙하고 경솔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다음에 왜 후회하게 되었는지 쓸 기회가 있기를...)
낯선 훈련소에 입소해서 처음 보는 사람과 같이 방을 쓰게 되었던 그 첫날. 점호가 끝나고 소등 후 내 침대에 누워 어두운 천장을 보고 있는데 울적하기도, 기대가 되기도 하는 양가적인 감정이 소용돌이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방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며 나와 같은 분야의 동기, 같은 나라로 파견되는 동기, 같은 나이 친구 등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빠르게 적응해 나갔고 걱정보다는 기대가 커져갔다. 훈련소 생활이 엄청 힘든 것은 아니었는데 여느 훈련소와 마찬가지로 바깥과 단절되어 있고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핸드폰 사용도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거의 쉬는 시간에 배드민턴이나 족구하고 삼삼오오 모여 '우리 여기 나가면 술 한잔 하자.' 말하며 훈련소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생활은 아침에 6시에 기상해서 뒷산을 타고 운동장에 가서 구보를 하고 돌아와 아침을 먹은 후, 하루 종일 수업을 받고 저녁 먹고도 추가 수업이 진행되었다. 밤 10시쯤에 점호를 마치면 소등하고 잠을 잤어야 했는데 잠들기 이른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일주일도 안 돼서 수면패턴이 고쳐졌고 오히려 훈련소를 갔다 와서 건강해졌다.
훈련소 퇴소하고 집에 오자마자 짐을 싸야 했다. 이민가방에 45킬로 짐을 채워 넣는데 '그렇게 가져갈 게 많을까?' 싶었는데 금세 45킬로를 다 채워버렸다. 출국날짜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확정되면 떠나야 하기 때문에 항상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퇴소하고 2주도 안 돼서 연락을 받게 되었다. 물론 나보다 먼저 떠난 다른 나라로 떠난 동기들도 있어 마음에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출국 날짜를 받으니 마음이 또 뒤숭숭해졌다. 친구들과 술 한잔 기울이면서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하고 출국날이 되었다.
인천공항으로 떠나기 전,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집에서 인사를 드리고 가게 되었다. 그날은 정말 내 인생에서 슬픈 날로 기억이 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렇게 우시는 모습을 처음 봤다. 특히 할아버지는 당시에 몸이 편찮으신 상태였는데 직접 보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마지막일 것 같다며 내 손을 꼭 잡고 건강하고 잘 지내길 바란다는 말을 해주셨다.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해주셨던 분이었는데 그 순간에도 가지 말라는 말보다 나를 응원해 주셔서 감사했다. 할머니는 나를 붙잡고 문 밖까지 따라 나오셔서 놓지를 못했다. 할머니를 꼭 안아드리고 2년 금방 가니까 금방 돌아오겠다고 인사를 드렸다. 이날 무뚝뚝한 우리 아빠까지 출국장에서 눈물바람이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내가 이렇게 가는 게 맞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나이가 먹을수록 그날 이겨내고 떠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 이렇게 내가 홀로 서는 과정은 쫌 dramatic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