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른한 오후 Oct 18. 2023

신바시역 플랫폼에서 생긴 일

<토란노몬오사카야스나바(虎ノ門大坂屋砂場)> 1872년 창업한 소바집

한국인보다 더 한국 사람 같은 일본인 직원

휴가를 갔다가 출근한 아침이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 총무 파트 쪽에 Y가 앉아 있었다. 나를 보더니 바로 부드러운 말투로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했다.


총무파트장과의 불화로 전임자가 갑작스럽게 회사를 관둔 탓이다. 이번에는 한국 사람으로 채용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말투나 외모가 한국 쪽이었다.

    

정식으로 총무파트 선임이 나에게 Y를 소개했다. 세무 관계 쪽으로는 일본 현지인이 필요해서 일본인을 채용했다고 했다. 아, 일본인이었다고? 나는 어떻게 한국 말을 그렇게 잘 하냐고 물었다.   

  

“사귀는 사람이 한국 사람이에요.”     


그런 말투 하나 하나도 영락 없는 한국 사람 그 자체였다. 물론 한국어를 잘 하는 것에 관한 의문점을 풀렸지만 아무리 봐도 한국의 피가 있을 것 같다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확실히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후쿠오카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박고 살아온 집안의 딸이었다. 여튼 그녀는 처음부터 상당한 신비감을 자아내는 존재였다.     


하얀 미소와 밝은 기운으로 많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는 매력의 소유자

그녀는 예뻤다. 얼굴이 갸름하고 고양이처럼 생긴 요즘 스타일의 미녀는 아니었다. 한국 전통 스타일의 수더분하고 편안한 인상이었다. 어딜 가나 맏며느리감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성격도 여간 싹싹한 게 아니었다. 그녀의 하얀 미소와 밝은 기운이 많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했다.  

    

회사생활도 성실한 편이었다. 특히 사람들과의 관계가 매우 좋았다. 항상 아랫사람과의 트러블로 유명했던(혹은 직장내괴롭힘을 했던) 총무파트장하고도 아무런 잡음 없이 잘 지냈다.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Y와 친한 직원들 몇 명 모아 저녁을 한 번 사기로 했다.  한 번은 꼭 가고 싶었던 회사 근처 토란노몬에 있는 유명 소바집으로 갔다.


관공서와 대기업, 주요 고층 빌딩이 즐비한 토란노몬과 가쓰미가세키.


관공서와 대기업이 즐비한 에 떡하니 서 있는 세트장 같은 건물 하나

토란노몬은 아카사카와 신바시 중간에 있다. 각종 중요한 관공서와 대기업이 몰려 있다. 특히 가쓰미가세키(霞が関)는 일본 관가가 다 모여 있는 곳이다.


토란노몬은 그런 가쓰미가세키의 한 자락이다. 일본에서 엘리트들이 다 모이는 곳이다. 차가운 회색빛이 지배하는 가쓰미가세키 언저리에서 세트장처럼 이물감이 느껴지는 건물이 나타난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이질감이 신선하다 못해 신기하다. 딱 들어서는 순간, ‘나 오래 된 소바집이야’ 하면서 그윽한 자태를 뽐낸다. 실제로 이 집은 ‘유형문화재’로 등록이 되기도 했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토란노몬에 세트장 같은 건물 하나가 섬처럼 자리잡고 있다.

    

오사카 모래 사장에서 시작한 소바집

스나바는 ‘모래사장’을 의미한다. 도요토미히데요시(豐臣秀吉) 시절 오사카성을 건설하든 모래적치장에 소바집을 내면서부터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도쿠카와이에야스(德川家康)가 천하를 통일하면서 도쿄로 ‘스나바’가 진출했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토란노몽에 자리 잡았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스나바’는 소바집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스나바는 '모래사장(砂場)'이라는 의미인데 소바집을 뜻하기도 한다.

후루룩 소바 먹는 소리에 발길이 멈추다

건물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오사카야스나바를 찾은 보람이 들었다. 건물 곳곳을 살펴 보다가 문을 열고 들어간다. 시간이 멈춘 듯한 실내에서 엘리트 직장인들이 후루룩 거리며 소바를 훔치고 있다.


이 집의 명물인 아게모노 소바(튀김 소바)를 시키려고 했다. 시간이 많이 걸린단다. 미리 전화를 했어야 한단다. 살짝 빈정이 상했지만 150년 된 소바집에서 주는대로 먹기로 했다.    


 

언제나 빈 자리가 없다. 소바는 일본인들의 국민 음식이니까.


소바를 먹는다는 건 세월을 먹고 마시는 일

850엔짜리 계란을 푼 평범하고 가장 일반적인 소바를 시켰다. 150년의 시간이 느껴진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세월이 주는 묵직함 때문인지 상당히 맛있다.


소바가 맛있어 봐야 얼마나 맛있겠냐고 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역사와 전통을 흡입했다라는 생각에 조금은 뿌듯해졌다. 10분간의 짧은 시간여행이 끝나면 다들 자기 자리로 돌아가 현실과 마주하며 일을 할 것 이다.     


소바 한 그릇으로도 영혼이 채워진다.

새우튀김이 드러누워있는 소바에 사케 한 잔 

큼지막한 새우 두 마리 아낌없이 드러누워 있는 덴푸라소바는 충분한 한끼 식사가 된다. 한국사람에겐 늘 허기진 일본 음식이지만 통통하게 살이 오른 새우 두 마리 튀김과 구수하고 깊은 소바를 먹으면 부족함이 전혀 없다. 거기다 가볍게 사케 한 잔 하면 세상 부러 게 없다.     


저녁에 예약하면 2층의 안락한 방을 내어주기도 한다. 거기서 먹는 맛은 또 다르다. 느긋한 시간을 편안한 사람들과 소바 한 그릇하면서 보내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일까.


행복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니까. 맛도 맛이지만 세월이 쌓인 전통을 흡입하는 곳이 오사카야스나바다. 꼭 한 번 가 보길 바란다. 아니 두 번, 세 번도 좋겠다.     


     

창문 너머로 소바를 즐기는 손님들이 보인다.


한 사람 한 사람 자신만의 스토리를 잔뜩 진 채 소바를 먹다

동행 중에는 일본인도 있었고 한국인도 있었다. 춤을 추고 싶었는데 부모가 반대해 일단 취직부터하자고 생각해 입사한 친구, 한국에서 락음악을 하고 개그맨 공채 시험까지 도전했다가 아무 생각없이 일본에 무작정 왔고 우리 회사까지 입사하게된 직원, 우연히 들른 일본의 매력에 빠져 사진 전공과는 무관하게 IT계열 회사에 취직했다가 우리 회사까지 흘러들어와 일본인 부인 만나 어엿한 세 아이의 아빠가 된 과장. 정말 한 명 한 명이 스토리 하나씩을 잔뜩 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인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한국인 같은 Y.     


모두 모두 더 알아가고 싶은 존재들이었다. 소바집을 나와서 신바시역 근처 맥주집에 들러 2차를 했다.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한 잔,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한 잔, 아름다운 비어홀의 분위기에 추해 또 한 잔. 그렇게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     


계단의 굽은 손잡이에서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느껴진다.



어느 한 군데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 없다.


신바시역에서 만난 사람들

시계를 보자 10시 반이나 됐다. 교외에 사는 친구들이 많아서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나가야 된다. 각자 인사를 나누고 자신의 집으로 향해 간다. 나 또한 집을 향해 가기 위해 신바시(新橋)역으로 분주한 발걸음을 옮겼다.


약간의 취기가 올랐지만 사람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밤이 깊어가는 신바시역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볼 수 있었다. 술에 취해 웃고 떠드는 젊은 무리, 분주히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여고생, 어깨에 피로가 잔뜩 내려앉은 직장인 등등.


차분한 일본 사람들이지만 되려 밤에는 더 활기가 있어보인다고 할까. 밤의 풍경은 한국이든 일본이든 다르지 않다.     


Y의 연인을 만나다

바깥으로 향하던 시선을 다시 내 쪽으로 당겨 왔을 때 건너 편 플랫폼에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왔다. Y였다. 그녀는 다른 여자와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끊임없이 대화를 속삭이고 있었다. 연인들끼리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전형적인 느낌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분위기에 심취해 건너 편에 있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 눈치다. 시간이 지나자 아리따운 Y가 여자의 품에 안겼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서스럼없이 스킨십도 했다. 오르던 취기가 말끔히 휘발됐다. 내 동공은 더 커지고 있었다. Y가 취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함께 있는 여자는 온전해 보였다. 급기야 둘은 입맞춤을 했다.     


아, 저 여인이 한국 사람이었구나.           


이전 04화 딩크족의 최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