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의 따끔한 한마디

누구나 각자의 입장이 있기 마련이다

by 글쓰는 아재
양화대교2.jpg 그렇게 평온하게 사진이나 찍고 다닐 때가 아니야




자, 내 처지에서 이야기해 볼게. 처음은 을지로였지. 넌 그날도 흥청망청 먹고 마셨고, 정신을 놓아버렸어. 그러고 나서 토사물이 널려있는 골목에 날 버리고 혼자 가버린 거야. 그 와중에 다른 친구 만나서 술을 더 마시겠다면서 말이지. 그날 내 행적은 너도 다음날 스마트폰으로 확인했을 거야. 어떤 미친 인간이 날 새벽 5시까지 끌고 다니면서 음료 자판기에 내 몸을 대고 천 원씩 살을 파먹었지. 그러는 동안 넌 신나게 술을 퍼마시고 있었고. 카드 분실 신고 전화 한 통이면 내 고통을 일시에 끝낼 수 있었는데, 미쳐버린 넌 뱃속에 술을 붓느라 정신없었던 거야.


그래, 그날 이후 네가 반성하는 모습과 한동안 금주하는 모습에 마음이 좀 풀렸어. 넌 새 지갑이 배송 오는 동안 내 몸을 보호하겠다며 흰 종이로 날 감싸고 다녔지. 그래, 그것도 좀 감동이었어. 그것까지 좋다 이거야. 그랬으면 정신 바싹 차리고 제대로 모셔야지. 넌 날 또 차가운 길바닥에 흘렸어. 심지어 맨 정신에 말이야. 세 시간 뒤 네가 헐레벌떡 뛰어오기 전까지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아? 흰 종이에 남은 선명한 자국을 너도 봤겠지. 신발과 타이어에 짓밟힌 자국 말이야. 변명할 생각 하지 마. 넌 날 죽일 셈이었던 거야. 그러고는 그 밤에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뛰어오는 꼴 하고는. 누가 보면 네가 가출 청소년 찾으러 온 엄마인 줄 알았겠다.


한동안 평온했어. 술도 안 마시고 열심히 살더라. 게으름 피우지 않고 한강에 가서 열심히 달리고 말이야.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어. 우린 꽤 오랫동안 함께 한강을 다녔고, 늘 잘해왔으니까. 그날 넌 평소와 달랐어. 집에 오자마자 급히 옷을 세탁기에 넣고 돌려버렸지. 주머니에 날 넣어놓은 채로 말이야. 지난번엔 압사로 죽이려 하더니, 또 물에 빠트려 죽이려고 해? 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죽을힘을 다해 세탁기 창문에 붙어 탈출하려 했어. 세제 섞인 뜨거운 물에 내 몸은 비틀리고 있었지. 그 급박한 상황에 소름 끼치는 장면을 본 거야. 세탁기 앞에 앉아 죽어가는 나를 멍하게 쳐다보고 있는 네 모습. 살인마. 사디스트. 변태 자식.


내가 그렇게 하찮은 거야? 네가 신나게 마시는 술, 늘어난 뱃살은 다 내 도움인 걸 몰라? 제발 날 소중히 대해줄 수 없겠니? 마지막 기회야. 한 번만 더 날 버리면, 그땐 진짜 우리 관계는 끝이야. 음식 대신 손가락을 빨고 살든, 술 대신 휘발유를 마시든 너 혼자 잘살아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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