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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뜬구름 Sep 05. 2016

철학하기

철학은 '앎'이 아니라 '함'에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늘에 대한 한숨과 내일에 대한 한숨이 서로 다르게 쌓여간다. 매일같이 이 후미진 골목을 오르내리다보면 더 이상 길을 보지 않아도 길이 보인다. 도착지는 있지만 목적지는 없는 이 길 위에, 나는 집에서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갈 뿐이다.

여느날과 같다. 같은 한숨, 같은 걸음을 재촉하며 집을 향하던 내 눈에, 다른 한숨, 다른 걸음이 보인다. 책가방을 짊어진 그 꼬마의 어깨는 가방의 무게가 인색할만큼 주저 앉아있었다. 저 어린 것이 왜 저토록 한숨을 쉴까. 그 힘 없는 걸음에 담긴 의미를 유심히 살폈다. 친구랑 게임 내기를 해서 졌나? 엄마한테 억울하게 혼났나? 숙제를 안했구나!? 온갖 유치한 상상에 생각을 기울이던 중, 괜스레 궁금한 마음에 아이에게 말을 붙였다.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서는 이윽고 닭똥같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선생님이 어제 숙제를 내주셨어요. 커서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싶은지 써오랬어요. 근데 아저씨, '아낌없이 주는 나무' 알아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에요. 그 책을 보고 맨날 이런 사람이 돼야지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적었는데 선생님한테 엄청 혼났어요."


 아이의 답은 '잘 베푸는 사람' 이었다. 답을 받아든 선생의 표정과 함께 아이의 당찬 포부는 찌그러졌을 것이고, 이내 선생의 입에서 나온 꾸중은 시끄러운 알람시계마냥 아이의 꿈을 끊었을 것이다. 꾸중의 끝에는 다른 친구들과의 비교가 있었을 것이고, 친구들의 모범적인 답에는 '연예인', '공무원', '소방관' 등이 적혀있었을 것이다. 아이는 처음 마주하는 어른의 잣대, 아니 현실의 벽 앞에 몹시 서운해 했다. 아이의 여린 마음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미 현실의 물벼락에 흠뻑 젖은 어른들은 그 차가움에 무뎌져 있다. 그러나 뜨거운 이상을 지피던 아이의 순수한 마음에 들입다 찬물을 끼얹었으니, 시리도록 추울 것이 분명했다. 해줄 말이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왠지, 그저 그런 위로나 충고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그런 자격이 있는지 부터가 의심스러웠다. 나는 먼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아이의 눈동자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당신은 이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줄 것인가


 섣부른 말은 아이에게 상처가 된다. 당신이 할 수있는 말, 해줄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말, 도움이 되는 말을 해야한다. 혹 옅은 미소를 머금은 응원 한 마디가 충분할 지 모를 일이다. 아이에게 현실을 강요해서도, 그렇다고 꿈을 강요해서도 안된다. 우리가 '아는 것'을 일러주는 건 큰 실수이다. 아이는 지금 자기 인생에 대한 철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수준 높고 진지한 철학을.




인생은 B와D 사이의 C다

 당대를 풍미했던 지식인,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생을 Birth와 Death 사이의 Choice라고 말했다. 존재를 탐구하는 고매한 실존주의자의 문장이라 하기엔 과감하고 간결하다. 그러나 동시에 빈 틈이 없고 견고하다. 그건 'Choice', 바로 '선택'의 힘이다. 우리 삶 주변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기로들이 즐비해 있다. 시공간과 인과, 우연과 필연, 자유와 법칙.. 수많은 철학의 핵심 속에서 인간의 몫은 오직 선택하고 선택당하는 것 뿐이다. 아침에 먹을 토스트를 몇 분 구울 지부터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정하는 것 까지, 죄다 선택 뿐이다. 그래서 자칫 우리는 선택을 연속되는 일상, 현실의 일부로 간주하게 된다. 허나 유능한 철학자 사르트르는 수많은 키워드 중 '선택'을 선택하였고, 그 선택에는 그의 철학이 온전히 담겨있다. 인생은 선택으로 채워져 있고, 선택은 철학으로 채워져 있는 셈이다.   




창조하는 어린아이

 니체의 철학은 지극히 독보적이다. '망치를 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당대의 전통을 깨고, 삶과 현실을 여실히 조명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파격적인 비판에는 반드시 응분의 대가가 필요하고, 니체는 이상적 인간상 '초인'을 내세워 그 대가를 적절히 지불하였다. 니체철학에서 초인은 가장 현실적인 모습의 절대자로, 또 가장 절대적인 모습의 세인으로 자리한다. 그것은 명확한 외관을 가졌으나 난해한 인상을 주고, 그 의도가 뚜렷하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구태여 초인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어린아이의 모습을 떠올려라. 초인이라하여 마치 영화 속의 히어로인양 멋지고 강한 인물을 떠올린다면 오산이다. 니체의 초인은 순수한 어린아이의 모습과 더욱 닮아있으니 말이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어린아이가 아니다. 순수하며, 자유롭고, 자신의 것이 확실한, 창조하는 어린아이다. 창조라는 것이 생각만큼 거창한 것이 아니다. 없던 것을 만들면 그만이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자신의 것을 구축하는 것이 창조의 본질이다. 니체의 어린아이, 나아가 초인은 기존의 전통을 따르기보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새롭고 독자적인 본연의 가치를 만들어 나아간다. 이에 니체의 이상과 포부, 철학이 자리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잘 베푸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아이를 보자. 아이가 선생님에게 자신의 꿈을 말하기까지, 아이는 많은 선택과 생각을 하였을 것이고 그 결과를 창조해냈을 것이다. 어른들이 정한 무수한 꿈들을 뒤로 한 채, 묵묵히 자신의 꿈을 선택하고 창조한 것이다.

 선택과 창조는 철학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기틀이다. 그 과정과 결과가 아무리 사소하고 비루하다 하여도 그것은 분명 철학하는 인간의 소산이다. 철학은 앎에 기초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와 베이컨이 지식을 사랑하였고, 근세의 철학이 인식론을 귀히 여겼다 할지라도, 그것은 앎에 기초하지 않는다. 철학은 '앎'이 아닌 '앎을 함'에 만족한다. 소크라테스도, 베이컨도, 인식론 역시 매한가지다. 철학에는 단순한 암기와 경험을 요구하는 법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사마천의 사기, 심지어 세상만사를 모두 저장한 컴퓨터가 있을지라도, 그것들이 철학을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철학에는 주체가 있어야 하고 실천이 따라야 한다. 선택과 추론, 사색, 도출, 창조가 자리해야 한다.

 당신이 철학을 한답시고 철학자들의 이름과 명언 몇 개를 열심히 외우고 있다면, 그저 안타깝기 그지없을 것이다. 차라리 공자님의 회초리를 한 대 맞는 편이 훨씬 많은 철학을 깨칠 수 있을 것 같다. 사르트르와 그의 실존철학을 아예 모르더라도, 자신의 뚜렷한 직관과 사고를 통해 올바른 선택을 해나간다면, 그것은 분명 철학이다.

 물론 철학사와 사상사를 등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이들이 그저 몇몇 철학자와 그들의 이론을 아는 데에 철학을 그치기에 심히 우려된다. 혹여 수 십 명의 철학자와 수 백 편의 고전, 수 천 개의 사상을 줄줄이 외울 수 있더라도, 그것을 대입하고, 비판하며,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곳엔 일말의 철학도 없다.



 감히 이른다. 현실의 허영심 가득한 교양으로서 철학을 알고자 하지 말라. 태도와 사고를 지배하는 폭 넓은 동기로서 철학을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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