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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뜬구름 Sep 09. 2016

이유와 목적

"왜?"의 철학

  왜?


 당신은 누군가에게 “왜?”라고 물은 적이 분명 있다. 당신은 그 사람에게 왜 “왜?”라고 물어봤는가? 그 첫째는 이유를 알기 위함이고, 둘째는 목적을 알기 위함이리라. 무고한 희생자를 처참하게 살해한 살인마에게 형사가 묻는다.

“왜 죽였어?” 

 형사는 무엇을 듣고 싶은 걸까? ‘왜’의 표면적인 목적은 이유를 묻는 데 있다. 돈 때문에 죽였다, 복수심에 죽였다 등등, 죽인 까닭을 묻는 것이다. 이유란, 해당 사건이나 결과에 이르게 된 근거를 이르며, 이는 그 시작과 출발점에 귀의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상하리만치 이 이유에 호기심을 품는 동물이다. “너 왜 그랬어?” “우리 왜 이렇게 된 거지?” “이게 왜 이래?” 어쩌면 우리는 삶의 꽤 많은 부분을 지나간 일의 근거를 찾는 데 소비한다. 그것이 ‘왜’의 일상이며, 또한 우리의 일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두에 언급했듯, ‘왜’의 목적은 이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형사의 왜 죽였냐는 질문에는 살인의 목적을 묻는 것이기도 하다. 돈을 갈취하기 위하여 죽였다, 복수심을 해소하기 위하여 죽였다. 언뜻 이유를 묻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일 것이다. 단지 ‘때문에’와 ‘위하여’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종이 한 장의 차이를 아는 데에 ‘왜’의 철학이 있다. 이유는 근거이며 시작이다. 허나 목적은 의지이며 끝이다. 이유가 ‘왜’의 일상을 대변한다면, 목적은 ‘왜’의 이상을 대변한다. 이유가 사건을 머무르게 한다면, 목적은 사건을 나아가게 한다.



 사실 삶 주변에서 이유와 목적의 차이를 깨우치기는 힘들다. 통상적으로 목적이 이유에 귀속되기 때문이다. 칫솔이 있는 이유와 칫솔의 목적은 ‘이를 닦기 위함’으로 같고, 이를 닦는 이유와 이를 닦는 목적은 ‘구강의 청결과 각종 질병의 예방’으로 같다. 우리 일상에서 목적의 목적성은 이유의 수준으로 격하되고, 사소한 근거를 찾는 데 정체되어 있다. 목적은 본디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정점에 위치하던 개념이었고, 그 이름이 나오지 아니한 고전이 거의 없는 고귀한 단어였다. 인간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국가의 목적은 무엇이고, 정치는 무엇을 향해야하는가? 논리의 목적, 도덕의 목적, 민주제의 목적, 법의 목적... 수없이 많은 강고한 목적의 옹벽 위에 시대와 역사, 사상과 기술, 철학, 인류가 성장했다. 모든 시대에는 걸 맞는 이상향이 필요하였고, 이상향을 그리는 데에는 철두철미한 정당성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그 정당성은 ‘목적’이라는 이름하에 언제나 대중을 현혹하였다. 우리는 그 대중으로서 목적을 직관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올바른 사고와 실천적 행보, 진취적 태도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낙엽은 왜 떨어지는가?

  방법은 간단하다. ‘왜’라고 묻는 것이다. 단, 목적을 묻는 진지한 물음이 필요하다. 일상의 이유를 묻는 ‘왜’를 줄일 필요는 없다. 그저 당연하고 명백해 보이는 당위와 법칙을 향해 반문하는 작업이 요구될 뿐이다. 인간은 왜 죽는가? 낙엽은 왜 떨어지는가? 나는 왜 ‘나’인가? 2+3은 왜 5인가? 등등. 너무나 자명하여 기계적으로 수용해왔던 수많은 법칙과 공리를 향해 ‘왜’를 던져라. 공리에는 이유가 없다. 2+3이 5인 것은 그것이 2와 3을 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3=5의 이유를 묻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그것은 사회적 약속이며 인류의 객관적 진리이다. 허나 그것이 아무리 월등한 진리라 한들 목적을 뛰어넘을 순 없으며, 우리는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그 목적을 향한 물음에 열의를 보여야한다. 그것이 ‘왜’의 철학이며, 철학의 태도이고, 인문학의 자세이다.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자세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과학적 사고를 표방하여 단편적 이유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현대는 자연과학의 시대이며, 자연과학은 이유를 중시한다. 그것은 잠재적 자만이다. 이유는 근거를 찾는 것이며, 목적을 등한시하고 이유에 매진하는 것은 앞이 아닌 땅을 보는 것이다. 현재의 모든 현상과 사건, 자연의 법칙을 증명하려는 시도가 언뜻 발전과 혁신의 아이콘으로 보일지 모른다. 허나 무릇 진리라는 것은 이 땅위에, 현실에 맞닿아 있지 않다. 절대적 진리는, 칸트의 말대로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 수 없을 만큼 머나 먼 저기 어딘가에서, 우리를 이끄는 하나의 이념이다. 우리가 그 이념을 향하여 손을 뻗는 흉내라도 내보일 수 있기를, 간청한다.    



 인문학이 가진 깊은 목적성에 집중하고, 진리의 흔적을 따라 끊임없이 나아가라.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속에 이유는 필요치 않다. 그것은 변명과 구실이 될 뿐이다. 정당하고 순수한 목적 하나,
더 이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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