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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아영 Oct 05. 2023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

영화 <레퀴엠>

결핍이란 단어와 중독이란 단어가 있다. 둘은 사전적 뜻도 다르고 단어의 생김새도 다르다. 둘은 확실히 '다른' 단어다. 결핍은 무언가 부족한 상태, 그래서 갈구하게 되는 상태를 말하며, 중독은 무언가를 지나치게 남용하거나 무언가에 지나치게 노출되어 더 이상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상태를 말한다.

사실 이 둘은 같은 의미를 갖는다. 결핍은 텅 빈 상태고, 중독은 무언가에 대한 환상과 정신 강박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다. 하지만 중독으로 채워진 것들은 사실 모든 게 다 거짓말이다. 


중독되어 버린 무언가로 일상이 가득 차 있다고 느끼지만, 그건 모두 술에 취해 잠시 꾸는 꿈들처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무언가에 중독된 사람들은 하루종일 그런 비현실성의 세상 속에 얽매여 산다. 가짜로 가득 채워진 가짜의 삶을 사는 것이니, '중독'은 결핍된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거나 더 나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마약 후에 느끼는 찰나의 롤러코스터 같은 환상은 모두 거짓말이다. 그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허상이고, 잡히지 않는 '죽은 꿈 dead dream'이다. 중독된 사람들은 죽은 꿈을 평생 쫓아다니는 송장들이다. 어쩌면 아마 평생을, 그 죽은 꿈의 환상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레퀴엠은 삶의 나락을 붙잡고 간신히 매달려있는 송장들의 죽은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는 결핍이 중독으로 이어지는 일관된 알고리즘을 보여준다.

사라 골드팝, 그녀는 남편을 먼저 잃고 집을 나가 잘 들어오지 않는 아들에 대한 공허함으로 매일 TV 속에 빠져 산다. 그녀는 외롭다. '태피 티본스 쇼'라는 다이어트 쇼를 보면서 일상을 달랜다. 그녀는 점점 TV 프로그램 쇼에 나오는 꿈을 가지게 되고, 어느 날, 태피 티본스 쇼에 출연해 달라는 의문의 전화를 받고 다이어트를 시작하게 된다. 살이 빠지지 않자 사라는 병원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그녀는 아침, 점심, 저녁, 밤마다 매일 하나씩 먹는 약을 처방받고 다이어트를 시작한다.


해리 골드팝은 그의 애인인 마리온과 행복을 꿈꾸는 방랑자다. 그와 마리온은 이미 적당히 마약에 중독되어 있다. 그들 각자에겐 뚜렷한 생산적 꿈이 없지만, 함께 있음으로써 강렬한 행복감을 느낀다. 해리는 그런 마리온과의 완벽한 일상을 위해서, 직접 마약 딜러가 되어 돈을 벌기로 작정한다.


타이론 역시 그런 해리와 함께 적당히 마약에 중독되어 있는 해리의 친구다. 해리와 마약을 함께 팔 궁리를 하며, 이 둘은 마약 딜러로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해리와 마리온, 타이론은 자의식과 삶의 목표가 존재하지 않는, 역시 결핍된 삶을 살아간다.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은 결핍이다. 인간은 결핍된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없다. 그들은 다른 이들처럼 무언가 밝고 양지의 목표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마약을 통해 인생을 성공 가도에 올릴 부푼 꿈을 안고 있다.

그들은 모두 하나씩의 치명적인 결핍을 가지고 있었고, 아직은 미약할지라도 이미 어느 정도의 중독을 가진 채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주인공들의 모습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영화의 중반부, 그들의 행보가 점점 그들이 꿨던 꿈에 가까워지는 것 같이 보인다. 해리와 타이론은 마약 딜러로서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마리온 역시 해리 옆에서 행복해한다. 해리는 마리온을 위해 옷가게를 차리기로 마음먹고, 해리의 일이 잘 되어갈수록 마리온 역시 적당한 마약과 함께 탄력 받으며 디자인에 몰두한다.


사라 역시 병원에서 처방받은 다이어트 약을 먹고 11kg 감량에 성공하게 된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살을 더 빼서, 빨간 원피스를 입고 다이어트 쇼에 나가 해리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일뿐이다. 그녀는 약만 먹으면 넘치는 것 같은 힘으로 행복하게 살을 뺀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꿈이 코 앞에 와있다고 믿으며 행복해한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더 중독되어가고 있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은 꿈에.

사라는 다이어트 약에 점점 중독되어 가며, 더 많은 양의 약들을 먹는다. 그러면서 온갖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며 행복했던 일상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녀는 이제 약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어간다.


타이론과 해리는 마약을 사들이는 데에 실패하고, 마약을 구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 와중에 이미 마약에 심각하게 중독되어 버린 마리온은 해리에게 약을 요구하고, 해리 역시 금단 증세에 시달려 괴로워하며 약을 찾게 된다. 그 와중에 그들은 모아둔 돈까지 전부 써버리게 된다.


해리는 마약을 살 큰돈을 마련하기 위해 마리온에게 매춘까지 시키지만, 결국 마약을 구하는 데에 실패하고, 마리온은 점점 더 금단 증세에 괴로워하며 스스로 들어가선 안 될 소굴에 빠져들게 된다.


해리와 타이론 역시 마약을 구하러 멀리까지 나갔다가 경찰에 잡히게 되고, 해리는 마약 주입 주사로 인해 팔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진짜 꿈을 죽은 꿈과 맞바꾼다.

레퀴엠은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작가주의적 색깔이 두드러져 보이고, 동시에 필모그래피 중 정점에 위치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파이보다 훨씬 잘 정제되어 있으며 실험적인 동시에 영화적이고, 블랙스완보다 훨씬 더 거칠지만 과감하고 자신의 색깔과 고집을 보여주는데 스스럼이 없다. 특히 독특하고 실험적인 편집의 흐름과 몽타주를 활용한 이미지 메이킹 기법은 그 어느 감독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강한 정체성이다.


한 시간 반이 넘어가는 영화에서 이런 자극적인 연출법을 사용하고 클로즈업이 난무하는데도 관객들이 이 영화에 깊이 빠져들 수 있는 건, 감독이 한 가지의 메시지에 고도로 집중하여 거의 완벽한 콘셉트적 연출을 유지하기 때문일 거다. 


이 영화는 '체험'의 영화이며, 어떠한 상세한 이야기나 대사, 주인공의 감정적 연기로 인한 몰입이 아닌 오로지 연출적인 체험으로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영화의 플롯 역시 체험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점점 중독되어 가는 주인공들의 정신 상태를 병치한 플롯은 관객들이 그들의 중독 상태에 함께 몰입하기에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레퀴엠은 어떤 것에 중독되어 가는 상태를 연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다소 강박적이고 빠르고 혼란스러운 편집 방법을 사용한다. 중간중간 화면이 페이드 아웃될 때마다 화이트 디졸브되는 화면은, 중독된 자들의 몽롱한 정신 상태를 체험하게 해 준다.

영화는 부드러운 흐름을 추구하지 않는다. 단절된 짧은 컷들이 연속적으로 붙어 중간에 무언가 끊기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빠른 편집 속도로 인해 그것이 답답하기보다는 정신없게 느껴진다. 


마약을 복용하거나 다이어트 약을 복용하는 시퀀스를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짧고 강렬하게 보여주면서, 약을 복용하는 것에 대한 강렬한 영화적 이미지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그들의 약 복용이 점점 더 잦아질수록 이 시퀀스를 활용해 효과적으로 중독의 가속화를 보여준다. 이 영화의 자극적인 사운드와 중독에 걸맞은 배경음악 사용 역시 약에 중독되어 가는 그들의 정신상태를 보여주기에 효과적이다.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이 영화에 사용한 핵심적 연출은 바로 '스피드'와 '이미지, 사운드의 확장'이다. 우리는 술 마시고 취한 경험만으로도 영화 속 주인공들의 정신 상태에 공감할 수 있다. 분절된 기억들과 시선들, 확대되고 일그러진 화면, 그리고 과장된 사운드, 일부분만 강조되는 일상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이 약을 복용하는 시퀀스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강조되었으며, 감독은 주인공들이 약을 복용하는 장면을 굳이 길고 섬세하게 표현하지 않는다(중독에 관련한 영화이기 때문에 복용 장면이 갈수록 많아짐에 따라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우리는 단 몇 컷의 연속만으로도 그들이 약을 복용한다는 걸 알아챌 수 있다. 또, 약 복용 시퀀스의 앞 뒤로 붙는 컷의 변화 역시 흥미롭다. 약을 복용하기 전 그들의 일상은 정상적인 속도이거나 느리다(갈수록 약을 복용하지 않은 상태의 일상은 느리고 몽롱하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약을 복용한 후, 빠르게 돌아가는 씬의 속도와 그에 맞춰 빠르게 어떤 행동들을 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그들이 마약으로서 경험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편집과 몽타주를 잘 활용한 예다.

영화 속의 이미지들 역시 대부분 확장되어 있다. 여기에서 확장의 의미는 말 그대로 모든 인물들의 얼굴이나 행위가 대부분 '확대'되어 클로즈업 혹은 익스트림 클로즈업 되어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그들의 상태를 시각화하기 위해 특수 렌즈나 특수 효과를 사용해 화면을 확장시킨다는 것이다. 


이 연출법은 사라의 플롯에서 두드러지는데, 점점 약을 더 많이 복용하면서 냉장고에 대한 환각을 보는 사라의 정신상태를 기괴한 효과로 시각화하여 보여주기도 하고, 사라가 적은 양의 약을 먹었을 때의 몽롱한 상태를 늘어지는 TV화면과 사라의 표정을 차례대로 연결하여 그 장면을 확장시켜 보여준다. 약에 심각하게 중독된 채로 병원에 방문한 사라의 시선을 어안렌즈를 통해 보여준 컷은, 연출적으로 렌즈를 잘 활용한 예로 자주 보이기도 한다.


인물들의 확대된 얼굴 속에 망가진 표정들은 그들이 얼마나 중독에 쩌들어 있는지를 알게 한다. 해리의 퀭한 눈, 타이론의 어딘가 강박적인 듯한 표정, 마리온의 몽롱한 눈빛, 사라의 맹한 얼굴들은 그들이 중독됨에 따라 망가지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영화의 초반에서도 그들의 표정을 내내 클로즈업되어 확대된 상태로 감상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그들의 얼굴 표정은 극심하게 달라진다. 인물들을 향한 일관된 앵글의 사이즈로 인물들의 변화를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방법 역시 중독을 설명해 주는데 효과적이다.

영화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보였던 부분은 '사라 골드팝'의 플롯이었다. 해리나 마리온, 타이론의 플롯은 사실 중독에 관한 영화에서 다소 전형적이다. 마약 딜러를 하며 마약에 중독되어 가는 해리와 타이론,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약물 중독에 더더욱 약한 의지를 보이며 그들을 더욱 혼란에 빠지게 만드는 마리온의 역할이 그렇다. 그들은 사실 스스로 마약 중독에 발을 들인 것이나 다름없으며, 처음부터 보기에 '이미 타락한 인생'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라 골드팝의 경우는 다르다. 그녀는 누구나 적당히 가지고 있을 만한 TV 중독(이건 시대적 배경을 포함하기도 하는데, 당시에 TV가 중독을 일으킬 수 있는 부정적 요소로 해석이 많이 되었기 때문에 이런 설정을 넣지 않았을까 싶다)을 가진 노년의 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이 복용하는 것이 마약인 줄 모르고, 오로지 자신의 소중한 꿈을 이루기 위해 처방받은 다이어트 약을 복용했다가 심각한 약물 중독에 빠진다. 


그리고 그녀의 정신 상태는 연출된 바에 의하면, 나머지 셋보다도 훨씬 더 고통스럽고 최악에 다다른다. 이렇게 본의 아니게 죽은 꿈에 빠져버린 사라 골드팝의 인생은 관객들로 하여금 강한 몰입을 유도하며, 그녀의 외로움에 공감하며 점점 중독되어 가는 그들의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관객들은 '나 또한 무엇인가에 중독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영화를 생생히 체험한다. 단지 마약뿐만이 아니라 게임, 휴대폰, 음식 등 그 어떠한 것이라도, 자의식이 없다면 중독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영화는 그렇게 그들의 파멸을 그린다. 그들의 육체는 아직 온전히 남아있지만(해리의 경우를 제외하고), 정신은 이미 오래전에 파괴되어 버렸다. 이 영화의 제목은, 그렇기 때문에 '레퀴엠 Requiem:죽은 이들을 위한 미사곡'이다. 감독은 다소 잔인하지만 냉정한 태도로 주인공들의 파멸을 고스란히 묘사한다. 그들이 결국 갈기갈기 찢겨 최후를 맞이하는 것 역시 마다하지 않는다.

사실 그들이 강렬히 원한 것은, 소소한 행복이었다. 사라는 세상에서 배제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노년의 여성이다. 그녀는 남편을 잃고, 아들인 해리마저 집에서 떠나보내며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것 같은 절망감에 빠진다. 그녀의 꿈은 TV쇼에 출연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스타가 되는 것이었다.


해리와 마리온 역시 각자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행복을 향한 욕망이 있었다. 해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마리온과의 행복한 일상을 꿈꿨으며, 마리온 역시 자신이 꿈꾸는 옷가게를 차려 해리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게 유일한 꿈이었다. 타이론 역시 애인과의 잠자리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평화와 행복뿐이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작은 욕망은 그들이 그들 스스로 자멸하도록 이끌어갔다.


영화의 마지막, 각자의 방식으로 자멸된 그들은 망가진 표정으로 익숙한 곳에 누워있다. 해리는 잃어버린 팔 한쪽과 함께, 타이론은 금단 증세로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마리온은 치욕스러운 행위 끝에 겨우 얻어낸 마약 봉지를 끌어안으며, 사라는 영영 이룰 수 없게 된 '테피 티본스 쇼'의 꿈을 꾸며.


그들은 간절하거나 혹은 행복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들의 그 고통스럽거나 행복한 표정은 화면을 통해 강조되다가 점점 줌아웃되며, 마지막엔 육체적 상태가 강조된다. 그들의 마지막 모습은 전부 '태아 자세'다. 감독이 정확히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 장면을 연출했는지 관객들은 알 수 없다. 그저 자신이 본 대로 해석할 뿐이다.


다만 나는, 이 모습을 통해 그들이 얻고 싶었던 것이 단지 '엄마의 자궁 속에 있었던 것처럼 편안하고 고요한 행복'이었다는 게 느껴졌다.
자의식이 없는 자들의 행복을 향한 욕망은 자멸을 유도할 뿐이다. 인간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만 한다. 알지 못하면 결핍을 느끼고, 그 결핍은 무언가에 중독되기에 가장 취약한 상태이며, 중독은 결국 파멸을 부른다. 


중독은 무언가의 과잉이나 포화가 아니다. 그것은 플러스가 아닌 마이너스다. 누군가의 세상을 모조리 부수고 치명적인 환상으로 가득 채워버리는 것. 있어서 좋은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없으면 안 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독이다.


레퀴엠은, 죽은 꿈을 좇는 좀비 혹은 송장들을 향한 잔인한 미사곡 같은 영화다. 관객들이 그들을 위해 불러줄 수 있는 미사곡은 그들의 인생에 공감하거나 동요하고 '그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참으로 잔인하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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