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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아영 Sep 26. 2023

예술로서의 자기반영적 영화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그의 영화를 많이 보지 못했더라도, 웨스 앤더슨의 영화가 철두철미하다는 것은 영화를 꽤나 보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특히 그의 대칭적 이미지는 한 시네필에 의해 대칭컷 클립 동영상이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하다.

그의 영화는 3등분의 법칙이라든지, 180도 법칙이라든지 촬영적으로 영화에서 지켜온 여러가지 요소들에 대한 강박은 모두 버린채, 오로지 웨스 앤더슨 자신만의 기준에 대한 강박을 철저히 가져간다. 그러니 인물은 늘 정 가운데에서 조금은 어색한 느낌으로 배치되어 있거나 화면의 양 끝에 팽팽하게 정렬되어 있다. 


그의 영화는 시각적으로 매우 아름답지만, 동시에 두 시간이라는 평균적 러닝타임을 견뎌내기에 조금 불안정하고 불편한 이미지들을 가졌다. 그 때문인지 그의 영화는 여느 예술 영화가 그렇듯이 관객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강하게 갈리는 작품이다.


웨스 앤더슨이 대칭적 이미지가 불안정함을 준다는 것을 모르는 감독은 아닐 거다. 실제로 그의 영화를 보면, 절대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는 그저 자신만의 기준과 법칙을 따르고자하는 것일 뿐이다. 


관객들이 그의 지나치게 치밀한 이미지에 힘겨워하더라도, 장인 정신으로 한 컷 한 컷을 쌓아올려 완성시켜야하는 의무가 그에게는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웨스 앤더슨은 단순히 영화 감독을 넘어서,
 '예술가'에 더 가깝다. 


특히 그의 영화는 미술쪽에 많은 공이 들어가 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면, 앤디 워홀의 팝 아트가 떠오르기도 하고,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 작품들이 떠오르기도 하며, 현대의 스타일리쉬한 음악가의 뮤직 비디오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다. 


그의 미장센과 이미지는 고풍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이고, 톡톡 튄다. 그는 단순히 서사로 이야기하기보단 이미지와 영화의 형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영화의 서사가 부실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단순하게 서사에 기대서 영화를 진행'시키지 않는다.


사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인물들은 조금 아리송하다. 가장 첫번째로는 우스꽝스럽고, 때론 히스테릭하며, 마음을 바쳐 사랑할 만큼 진중하지 않다. 이 영화는 인물에 푹 빠져들어 보게 되는 류의 영화는 아니다. 물론 엉뚱하고 나름의 귀여움을 가진 구스타브나 제로, 혹은 그 외의 인물에 매력을 느낄 순 있지만, 그들 중 누구에게 심히 몰입하여 인물의 인생을 자신의 인생까지 끌어온 관객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보통의 영화는 탄탄한 서사와 입체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하지만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그보다도 영화의 형식과 컨셉, 이미지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집중해서 봐야할 대목도 바로 이 부분에 있다. 이 영화의 '형식'이다.

영화는 정확히 4겹의 두께를 가진다.


가장 겉에는 죽은 작가를 기리는 한 충실한 독자가 있고, 그 안에는 해당 작가의 인터뷰를 다룬 짧은 층이 있고, 다시 그 안에는 이제는 사람이 거의 오지 않는 오래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젊은 작가(주드 로)가 호텔의 주인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는 층이 있고, 다시 그 안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스타브와 제로를 둘러싼 마담 D의 살인사건, 이 영화의 주플롯이 있다. 생각해보면 꽤나 복잡한 구조다.


영화에서 '구조' 혹은 '형식'을 사용한다는 것은, 영화의 내용을 반전시키거나 영화 자체를 형식의 변환으로써 크게 감싸줄 수 있는, 어떠한 큰 주제를 담겠다는 의지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게 형식으로 영화를 이리저리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감독에는 홍상수가 있다.) 


그래도 어찌됐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영화'다. 실험 영화가 아니라면, 영화에는 적절한 서사가 있어야 하고 적당한 인물들이 살아 움직여야 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의 서사는, 여느 살인 사건에 적용되어 있는 수많은 플롯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어쩌면 관객들에게는 매우 익숙하고 친숙한 서사일지도 모른다. 


초반부에 구스타브에게 마담 D의 재산이 돌아간다는 것은 시네필 수준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추리물 플롯의 원형에 가까운 다소 고전적인 서사이다. 그렇다면 웨스 앤더슨은 왜 이런 단순한 서사의 이야기를 써냈을까.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안 쪽에 위치해있는 플롯인 구스타브와 제로의 이야기는, '고전' 그 자체에 비유된다.


우리가 예술을 공부할 때 흔히들 명작이라고 하여 읽게 되고, 수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혹은 영감을 받아 내 정신에까지 완전히 뿌리내리는 그러한 작품들 말이다. (구스타브와 제로의 이야기가 1부~5부의 목차로 진행되는 것 역시 고전 명작의 형식에 대응된다고 볼 수 있다.) 


구스타브와 제로의 이야기는 (적어도 영화 안에서) 굉장히 감동적인 하나의 정신이자 소중한 이야기다. 이것은 제로의 세월에 오랫동안 간직되어 젊은 작가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젊은 작가는 제로가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진중하게 듣는다. 그리고 작가는 세월이 흘러, 그 이야기를 오래도록 간직한 후에 자신의 책에 적어낸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독자들에게 그 책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고 또 오랜 세월이 흘러, 현대의 새로운 독자는 작가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그의 이야기를 진중하게 읽는다. 그는 그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고, 죽은 그의 조각상 앞에 서서 그를 바라본다.(그리고 이 독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이 작가를 존경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시대를 달리 산 세 인물들은 모두 '구스타브와 제로의 이야기'라는 정신을 공유한다. 이것은 아주 오래전 창작된 고전을 읽은 작가가 후에 시간이 많이 흘러 그것에 대한 영감으로 자신의 창작물을 만들어내고, 현대의 독자가 그것을 다시 읽어 그에 대한 영감을 물려받아 유지하는 이야기와 같다.

우리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영화를 통해 역사적인 예술이 후대에 전달되며 그 가치를 유지하는 것과, 후대의 예술가로서 예술의 명품을 존경하고 기리는 자세에 대한 암시적 텍스트를 읽어낼 수 있다. 


웨스 앤더슨이 슈테판 츠바이크를 읽고 영감을 받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만든 것 또한 같은 맥락이며, 웨스 앤더슨은 자신이 슈테판 츠바이크를 읽고서 받은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영화의 형식을 통해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위대한 예술, 위대한 정신은 다시 위대한 예술을 통해 혹은 위대한 인물을 통해 전달되며, 그렇게 전달된 위대한 예술은 또 다시 위대한 인물에게 전달되어 그의 영혼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지점에 대해, 웨스 앤더슨은 예술적인 태도로 그것들을 보여준다.


영화 속 시대가 달라질 때마다 화면비가 변하는 것(각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많이 쓰인 화면비)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또 이 영화의 구스타브와 제로의 플롯에서 화면비를 보면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비율을 볼 수 있는데, 그때문에 화면의 세로축이 강조된다(최근에 많이 사용되는 2.35:1이나 1.85:1의 경우, -특히 2.35:1이-가로축이 강조되는 면이 있다). 


그런데 웨스 앤더슨은 거기에 추가적으로 대칭의 화면을 사용하여 세로축이 완전하게 부각되는 효과를 보여준다. 물론 웨스 앤더슨이 원래부터 시각적으로 대칭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지는 대칭과 '세로축'은 메시지와도 연결된다. 세로로 길게 이어지는 이미지들과 미장센들은 대를 이어 가치를 유지해오는 예술들에 대한 암시적 은유이기도 하다. 


후반부에 조플링을 뒤쫓을 때의 화면이나 케이블카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 등, 이 영화는 유독 세로로 이동하거나 세로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화면비에 따른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지만, 의미적으로 영화의 메시지와도 연결지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내내 이어지는 화려한 색감과 완벽한 이미지는, 그 이미지 자체로 품격 높은 명작이나 고전을 상기시킨다. 플롯으로 보나, 이미지로 보나, 그 완전함과 완벽함으로 보나 구스타브와 제로의 이야기는 모든 면에서 우리가 칭송하는 ‘명작’(혹은 바이블)을 상징하고 있다.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4겹의 두께 속을 다시 차례대로 빠져나온다. 그리고 대망의 엔딩은 책을 읽고 있는 현대의 독자의 모습에서 끝난다. 구스타브와 제로의 이야기가 인물들을 타고 시간을 흘러 현대의 독자에게까지 고스란히 전달된다. 


스크린 앞이 놓인 우리 역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봤지만 슈테판 츠바이크의 영혼을 공유한다. 우리가 어떻게 읽든, 이 영화는 상당히 많은 텍스트와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어쩌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여태 웨스 앤더슨이 수많은 예술에 의해 영감받아온 시간들에 대한 은유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현재의 독자는 한 작가의 글로 인하여 구스타브와 제로의 감각적 세계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마찬가지로 웨스 앤더슨은 죽은 작가를 기리던 현재의 그 독자처럼 슈테판 츠바이크를 물려받았다. 그리고는 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만들었다.

예술은 세로로 긴 줄을 타고 내려와 또 다른 예술과 관객을 낳는다. 
지금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슈테판 츠바이크를 바라보지만, 언젠가 다른
누군가가 웨스 앤더슨을 바라보며 새로운 향수를 음미할 것이다. 


웨스 앤더슨 역시(어쩌면)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을 읽으며 겪어본 적 없는 향수에 젖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떠올렸던 것처럼(이 부분에 대한 것은 이동진 평론가의 평과도 맞닿아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이러한 모든 '예술의 기나긴 맥'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는 감독으로서의, 예술인으로서의 웨스 앤더슨의 충심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충심은 또 다른 영감을 기다리는 예술적인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예술로서의 자기 반영적 영화'이다. 여태 역사속에 존재해왔던 예술의 품격과 그 지위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들이 후대를 내려오며 지위와 그 안의 메시지를 이어온 방식들과 더불어 이 영화 자체의 품격과 그 미래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모든 자기 반영적 성격이 들어가있다.


그는 이 메시지를 위해 한 컷 한 컷 정성 들여, 대단히 덕후스러운(?) 강박증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완성시켜냈다. 이토록 아름답고 매력이 넘치는 작품을.


웨스 앤더슨, 그는 확실히 예술가다. 예술가임이 틀림없다.
 예술을 늘 흠모하는 관객으로서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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