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테넷>
영화는 시간의 장르이고 시간과 인과율은 떼놓을 수 없는 만큼,
영화는 인과율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시간을 역행하거나 과거에서 미래로 점프하는 식의 영화들이 처음에는 신선해도 결국 진부해진 이유는 어김없이 인과율의 법칙에 적용을 받기 때문이다.
과거의 사건은 언제나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물리학의 법칙이자 영화라는 장르의 형식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법칙이다. 플롯이 거꾸로 가든, 순서가 뒤바뀌었든간에 과거가 미래를 지배하는 식의 일방향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전부 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공간=시간이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공간과 시간은 뗄 수가 없으며, 우리는 시간이라는 비현실적인 관념을 감각하기 위해 공간을 빌려온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는걸 인식하지 못하지만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인식하며, 우리 신체의 노화 혹은 과거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한 변화의 결과로 인식한다. 결국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시간에 따른 사건들의 결과일뿐, 결코 시간은 아닌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여행 영화들은 공간과 사건을 시간 대신 인식하는 현실에서의 감각을 그대로 가져오기 때문에 그다지 새로운 걸 기대하기가 어렵다. 모든 것은 통째로 바뀌고, 사건은 전부 인과법칙의 영향을 받아 바뀔 수 있는게 거의 없다. 영화 <어바웃타임> 역시, 결론으로 도달해서는 그냥 현재를 있는 그대로 즐기라는 말을 전한다. 인간이 선형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야기의 결론은 넓게 뻗어나갈 수가 없다.
<테넷>은 여기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엔트로피의 역행을 통해 무질서가 질서로 향하게끔 만드는 것.
이것은 말그대로 시간 그 자체에 관한 이야기다. 테넷에서의 시간 여행은 인과율이나 사건의 전후를 따지기보다, 말그대로 ‘거꾸로’ 흘러간다. 무질서에서 질서로 향하는 <역선형구조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시간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여러 공간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시간 역시 여러 주체의 여러 타임라인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한 시점에서 무수히 많은 타임라인이 존재할 수 있게 되고, 여기에서 인과법칙이나 원인과 결과라는 굳어진 구조는 사라진다. 과거는 동시에 미래가 되고, 미래는 동시에 과거가 되며, 이 모든것이 ‘지금’, ‘동시에’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형적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어떻게 될 것인가.
테넷은 애초에 이 질문에 대해 양립하는 두 세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선형적 구조가 파괴되면 인간 역시 파괴될 것이라는 테넷의 생각과, 어쩌면 선형적 구조가 파괴되어도 인간은 파괴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믿는 사토르의 세력. 영화에서도 이 부분에 관한 결론은 교묘히 피해간다. 모든 인물은 과거 혹은 미래의 자기 자신과 마주치지 않으며, 아슬아슬하게 각자의 타임라인 속으로 사라진다.
테넷을 놀라운 영화라고 평하고 싶은 이유는 선형적인 구조를 파괴한 플롯 때문이다. 영화의 플롯은 곧 인간 사유의 흐름과 방식을 따라가게 되어있고, 대개 인간이 사건과 삶을 기억하는 방식대로 플롯이 구성된다. 그러나 테넷은 인간으로서 가능하지 않은 플롯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곧 영화라는 장르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이자 실험이기도 하다. 관람을 시작하는 순간 뒤로 돌아갈 수 없는 선형적인 영화의 구조 안에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비선형적 구조를 체험하게 된다. 아마도 이것은 최초의 체험일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지각의 방식을 체험함과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의 구조를 체험한다. 가장 커다란 대표 플롯의 안쪽에는 무수히 많은, 자잘한 플롯들이 있다. 그리고 그 플롯은 인버전되거나 인버전되지 않은 각각 주체들에게 전부 부여된다. 인물들이나 상황들은 반드시 전체 이야기를 위해 희생되지 않고 각자의 목적과 방향을 위해서 각자가 흘러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마지막 목표에 다같이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마치 마법을 부린 것처럼 경이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영화라는 장르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이 일정 부분 결여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기본적인 심리를 명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그렇다. 캣과 주인공의 관계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인버전보다도 더 미지의 영역이었다. 혹시 뒤얽힌 타임라인 속에서 캣과 주인공의 숨겨진 관계가 있는 건 아닐까 유추해보게 되기도 하는데, 의도되었든 의도되지 않았든간에 인물들의 심리와 관계가 잘 보이지 않음에도 그것이 사건을 이끌어가는 주된 원동력이 된다는 건 이야기에 있어서 결함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