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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아영 Oct 02. 2023

비포 시리즈의 롱테이크

영화 <비포 선라이즈>, 영화 <비포 선셋>, 영화 <비포 미드나잇>

꿈과 같은 영화의 엔딩씬이 끝난다.
곧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며 우린 다시 꿈에서 깨어나 현실에 머무르게 된다.
삶은 지속되고, 영화는 끝난다.
아니, 사실 삶은 끝나도 영화는 영원히 지속된다. 
영화를 보기 이전의 나는 이미 끝나버렸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은 다음 편이 시작되지 않는다면 내내 그 모습 그대로 지속된다.

이러한 영화의 연속은 ‘의식적인 연속성’이다. 우리가 영화를 연속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대개 스크린에서 컷으로 조각난 삶의 흐름을 관객의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는 생각보다 연속적이지 않다. 


삶에 비추어 보면, 영화는 연속적이기는커녕 분절적인 컷의 조합일 뿐이다. 영화는 감독의 선택에 따라 플롯이란 장치를 통해 재배열될 수 있고, 시간이나 공간의 균열을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단단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바로 영화 자체가 ‘픽션’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어찌 됐든 영화는 픽션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아무리 영화가 연속성을 가진대도 영화의 연속성이 삶과 맞닿기는 꽤나 힘든 일이다. 이유는 영화가 가진 태초의 기반이 삶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영화가 끝나면 끊긴 기억들로 희미하게 영화 속 분절된 컷들을 회상하며 삶을 다시 시작한다. 영화는 보통 이런 식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하지만 거리를 걸어 다니며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비포 시리즈의 제시와 셀린느를 보면, 좀 의아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비포 시리즈 속 롱테이크는 기존의 영화들과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들이 걸으며, 서로를 바라보며, 영혼이 듬뿍 담긴 대화를 나누며 음미하는 시간들은 현실의 시간과 거의 비슷하며(비포 선셋이 그 부분에서는 정점에 있다) 그들의 대화는 억지로 끊기지도, 편집되지도, 철저히 완성도가 높게 배열되어 있지도 않다.


 그저 거리를 걸으며 우연적 계기를 통해 하나의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그들의 이야기의 전부다. 좀 더 형이상학적으로 다가가 보자면, 묘사하기 어려운 그들의 눈빛 안에 담긴 열정과 진지한 말투, 바로 '사랑'이란 것이 그들 이야기의 전부다.


비포 시리즈의 롱테이크는 마치 관객이 제시나 셀린느가 되어, 혹은 길에서 실제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을 훔쳐보는 것처럼 영화를 보는 시간 자체를 리얼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뜬금없지만 끊임없고, 명확한 주제는 없지만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들을 말하게 된다는 점에서 대화의 모든 부분이 정수다. 


카메라는 그들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뒤따라간다. 마치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라는 배우는 이 세상에 없고, 오로지 제시와 셀린느만 남아있는 것처럼 관음적인 시선으로 그들의 삶을 훔쳐본다. 그들의 대화는 정말로 우연히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20대의 열렬한 청춘 같고, 서로를 애타게 갈구하는 30대의 로맨스 같으며, 서로를 원망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고 아름다움을 꿈꿨으나 아름답지 않은 것에 통탄하지 않는 40대의 원숙함 같다. 아마 이 모든 것들을 롱테이크 속의 대화가 아닌 분절된 컷의 세세한 묘사로 보여주려 했다면 비포 시리즈는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비포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대화와 인물, 롱테이크, 시간이다. 


그중에서도 롱테이크는 영화적인 기법으로서도, 시간과 묘사의 부분에서도 많은 효과와 의미를 내포한다.


시리즈의 시작인 <비포 선라이즈>에는 시간의 왜곡이 존재한다. 그들은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거의 하루를 통째로 같은 공간에서 보내지만, 영화의 러닝타임은 100분에 그친다. 그러나 시간의 왜곡은 ‘강렬한 첫 만남’이 주는 의식적인 시간의 왜곡으로 합리화할 수 있다. 


비포 선셋과 달리, 비포 선라이즈에서 그들이 공유하는 시간은 집중과 핵심이라기보다는 새로움과 설렘에 가깝다. 그들의 대화는 굉장히 진지하지만 한편으로는 깊이가 덜하다. 처음 만난 상대와의 정열적인 감정에 휩싸인 대화는 깊이 있는 사랑보다는 설렘과 감정적 충동을 암시한다. 게다가 이 둘은 여태 쌓아온 역사가 없다.


그렇기에 그들의 모든 대화가 충실히, 시간을 왜곡하지 않은 채 적나라하게 묘사되기보다는 그들의 시간이 너무나도 빨리 흘러갔다는 것에 맞추어 묘사를 하는 편이, 처음 만난 열정적인 커플의 사랑을 보여주기에 적절한 선택이었다.

 아마 그들은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는 단 십 분간의 시간이 자신들의 한 시간을 뺏어갔다고 생각했을 거다. 관객들은 그와 같이 의식적인 시간을 공유하며 처음 만난 상대와의 짜릿한 사랑을 제시와 셀린느를 통해 간접적으로 즐긴다.


그럼에도 선라이즈는 롱테이크로 점철된다. 선라이즈는 마치 사랑하는 연인과의 첫 만남을 회상하는 자의 기억을 재현한 것 같기도 한 영화다. 가장 기억에 남고 뚜렷하고 의미 있고 생생한 부분들만을 추려서 롱테이크로 연출해 낸 것이 그렇다. 롱테이크 장면 안에 담긴 어색한 그들의 짙은 대화는 이 연인이 서로를 한동안, 혹은 평생 동안 서로를 깊이 그리워하고 사랑할 것이라고 가늠하게 해 준다. 


그들의 대화는 관객들이 시간의 지속성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든다. 가끔 장면이 전환되며 흘러가던 연속성이 뚝 끊길 때가 있지만, 그것마저 마치 한 사람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처럼 의식적인 연속성을 갖는다.


선라이즈의 마지막, 밤을 보낸 연인은 무언가 많이 달라 보인다. 둘은 어딘가 자유로워 보이고 답답했던 셔츠의 첫 단추를 풀어낸 것처럼 묘사된다. 처음 만나 밤을 보낸 커플에게 그토록 자연스럽게 풀어헤쳐진 머리와 부은 얼굴, 풀어진 옷차림이 허용되었다는 건 그들이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사랑을 공유했다는 걸 증명한다. 

기차의 앞에서 진한 키스를 나누고, 그들은 헤어진다. 이토록 짜릿하고 진실된 사랑이 다른 사랑처럼 속절없이 시들해질까 두려워 연락처도 교환하지 않은 채. 마지막의 롱테이크는 연인의 안타깝고 불안한 마음을 끝까지 놓아주지 않으며 그 흐름을 끊지 않은 채 관객들을 놓아준다. 끝나긴커녕 무엇 하나 제대로 시작되지 않은 것처럼 영화는 끝난다.

롱테이크는 비포 선셋에서 정점에 이른다. 9년의 기다림 끝에 다시 만난 연인은 중간에 단 한 번도 재회한 적이 없지만, 수많은 역사를 가지고서 다시 만난다. 그것은 관객도 물론 마찬가지다. 


선라이즈의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던 마지막 롱테이크는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음에도 영화의 문이 닫히지 않게 만들었고, 열린 영화의 끝에서 지속되어 왔던 제시와 셀린느의 사랑은 영화가 잠시 멈춰있던 십 년간의 시간 동안 실질적인 사건이나 부딪힘이 없이도 내적 역사를 쌓아왔다. 


관객들이 십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느를 잊었다고 하더라도, 선셋이 시작되는 순간 십 년간의 역사가 마법처럼 정리된 채 영화에 빠져들게 된다. 9년 만의 재회이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서로를 마주하는 제시와 셀린느의 모습처럼 관객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들의 사랑을 마주한다.


선셋은 시간의 왜곡이 거의 없는 영화다. 그토록 강렬했던 첫 만남 이후, 그들은 서로가 이루어질 수 없고 또다시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안다. 영화는 그런 그들의 간절한 만남의 시간을 오롯이 롱테이크로 담아낸다. 간절히 약속했던 만남에 실패한 커플은 9년간의 긴 기다림 끝에 의외로 덤덤하게 재회한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 컷의 앵글에 비친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그들의 만남이 결코 덤덤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들의 대화는 여전히 열정적이고, 서로를 바라보는 진실된 눈빛 역시 변함이 없다. 서로를 갈망하는 너무도 짧은 시간 90분을, 감독은 왜곡을 최소화시켜 그대로 담아낸다. 

그들이 가진 추억이나 기억은 매우 짧지만, 단 하나만의 추억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도 역시 카메라는 연인의 짧은 시간을 왜곡 없이 전달한다. (제시가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셀린느와의 이야기 때문이었고, 제시가 그 소설을 완성시킬 만큼 셀린느와 그에 대한 기억을 사랑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롱테이크에 담긴 여전한 그들의 대화와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많은 감정과 사랑을 함축한다. 그들의 시간과 사랑의 감정을 온전히 전달한다는 점에서, 롱테이크가 가지는 역할은 빛을 발한다. 특히 마지막 엔딩에서의 롱테이크는 지난 9년간의 기다림처럼 그들의 사랑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영화는 여전히 닫히지 않은 채 지속된다. 선셋의 마지막은 그들의 역사가 멈추지 않고 계속 기록되게 만들었다. 미드나잇의 시작과 함께 이미 결합된 그들의 관계가 당황스럽지 않은 이유는 선셋의 닫히지 않은 결말에 있다.

하지만 여태의 롱테이크와 미드나잇의 롱테이크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선라이즈와 선셋의 롱테이크는 제시와 셀린느, 이 둘 만의 관계에 집중한다. 카메라엔 오로지 이 둘만이 묘사되며, 다른 인물은 그저 엑스트라, 단역으로만 등장한다. 혹은 형체 없이 대화로만 전달될 뿐이었다. 


그러나 미드나잇에서는 제시와 셀린느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단지 단역이 아니라 제시와 셀린느의 인생에 머물러 있고 분명한 발자취를 남기는 인물들로 묘사된다. 롱테이크의 카메라는 더 이상 사랑스러운 두 연인만을 담지 않는다. 제시와 셀린느 각각의 인생에 긴장감을 주는 새로운 친구들과의 대화가 그들의 인생과 시간을 채운다.

미드나잇에서는 전의 시리즈들보다 훨씬 더 분절된 느낌의 컷이 많이 나온다. 


그들의 인생은 더 이상 서로만을 향한 사랑으로 점철되지 않고, 그들을 둘러싼 수많은 주변 인물들과 함께 점철된다. (어찌 보면 성숙하고 나이 든 사랑의 특징이지 않을까 싶다.) 그들의 인생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는 귀여운 쌍둥이 아이들, 그들과 대화를 나눠줄 원숙하고 안정된 친구들이 앵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둘의 사랑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여전히 선라이즈나 선셋과 같은 종류의 롱테이크를 활용한다. 그들의 인생과 사랑이 이젠 더 이상 단 둘만이 아니라 수많은 인물들에 의해 함께 점철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둘의 관계는 둘만의 감정과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미드나잇의 롱테이크가 빛나는 지점은 이 커플이 오래된 감정싸움을 지속하는 시퀀스에 있다. 이 시퀀스가 미드나잇의 핵심을 담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단지 두 사람의 짙은 눈빛과 사랑이라는 감정만이 그들을 채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랑 이외의 것들로도 제시와 셀린느의 인생이 채워져 왔다는 것을, 우리는 다투고 있는 둘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카메라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그들의 대화를 끈기 있게 담아낸다.

 오래된 커플에게 투쟁과 싸움이란 숙명이다. 둘 이외의 수많은 것들로 인생을 완성시켜 가는 그들이지만, 결국 그 이외의 것들을 ‘둘만의 인생’에 제대로 점철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싸운다. 그들이 싸우는 것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사랑하기 위함이다(또 서로를 존중하기 위함이고, 배려하기 위함이다). 


카메라는 그런 그들의 사랑의 ‘뒷모습’ 역시 어떠한 왜곡 없이 담아낸다. 그 치열한 말다툼의 시작과 끝을 우리는 보았기에, 또 그들의 인생이 너무나 많은 역사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기에 우리는 서로를 상처 주면서도 애써 웃는 그 중년 커플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의 낭만에 속아 사랑의 수많은 뒷모습을 잊어왔던 관객들은 그들의 화해를 통해 결국 그 모든 것이 사랑의 모습임을 확인한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들의 치열한 싸움을 담은 롱테이크가 제시와 셀린느의 사랑을 증명해 주고, 완성시켜 주는 것만 같다.


당장이라도 분리될 것처럼 싸웠음에도 결국 서로를 향해 웃어 보이는 제시와 셀린느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그렇게 그들의 인생과 그들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웃고, 서로의 머리칼을 매만져주는 것만이 사랑이 아님을 안다. 

서로를 죽일 듯이 쳐다보고, 상대에게 눈물 혹은 분노로 호소하게 되는 것 역시 사랑임을 안다. 그것은 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은 롱테이크로 설명된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은, 역시 뚜렷한 예고나 형식 없이 마무리된다. 선라이즈와 선셋이 그러했던 것처럼, 또 우리의 인생이 그러한 것처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롱테이크의 연결성은 가끔 분절된 컷들의 화려한 몽타주로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릴 때가 있다. 삶에 있어서, 또 스크린에 있어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보여준다’라는 것은 굉장히 철학적이지만, 동시에 관객들의 시선을 잡는 것엔 취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존재해야 함을 증명하는 ‘필연적’ 롱테이크가 존재한다. 우리는 아마도 비포 시리즈에서 그러한 필연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 혹은 두 사람의 사랑, 그들의 인생. 이것들을 이토록 설득력 있고 실감 나게 보여준다는 것은, ‘롱테이크’라는 끊임없는 움직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롱테이크 속에 담긴 제시와 셀린느의 사랑은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영원할 것이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 1995
영화 <비포 선셋> 2004
영화 <비포 미드나잇>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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