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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아영 Sep 06. 2023

목소리와 이름이 사라진 세상

영화 <행복한 라짜로>




라짜로. 라짜로.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여기저기에서 라짜로라는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맑은 눈동자와 순수한 눈빛을 가진 라짜로의 얼굴은 그저 잔잔한 미소만을 머금으며 사람들의 목소리에 일일이 대응한다. 하지만 라짜로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어딘가 냉담하고, 라짜로는 늘 사람들의 시선 밖에 있다. 무얼까, 이 존재는? 

나는 어딘가 소외되어 버린 라짜로의 모습과 카메라의 시선을 쫓아가다 생각한다. 분명히 부름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이질적인 이 존재는 무엇일까. 라짜로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닭장을 관리하고, 동물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그 속에서 매우 분주한 사람들을 보니 마치 아름다운 옛날의 시골 풍경처럼 보이는 마을 인비올라타. 영화가 진행되고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이 마을 속 사람들이 마냥 행복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들은 누군가를 위해 일하는 노예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었으며, 쉴 틈 없이 일만 해야 한다. 그 속에서도 가장 바쁜 건 역시 라짜로다. 


 

늘 누군가의 부름을 받아 가장 성실한 ‘노예’로 살아가는 라짜로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불평불만도 없다. 그는 늘 미소가 지어진 순수한 얼굴로 그저 사람들의 부탁에 모두 응해줄 뿐이다. 그렇게 사람들 속에서 무시당하고 소외될 것만 같았던 라짜로는, 마을의 지주인 후작 부인의 가족들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친구를 갖게 된다. 


그는 후작 부인의 아들 탄크레디. 모두가 라짜로를 무시하는 틈에 유일하게 탄크레디만이 라짜로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그 역시 라짜로를 순진한 노예 정도로 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탄크레디는 인간으로서 라짜로에게 말을 건넨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탄크레디와 라짜로의 관계는 이후부터 조금 각별해진다.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시달리고 눈치를 보던 라짜로는 어느 날 열병을 앓게 된다. 열병에서 깨어나자마자 라짜로는 탄크레디에게 향한다. 열병을 앓고도 순수하게 탄크레디를 찾아다니는 라짜로의 모습은 연민과 안쓰러움을 자극하지만, 라짜로의 ‘열병’은 영화를 새로운 국면으로 빠지게 만든다. 라짜로의 열병 이후, 라짜로는 탄크레디를 찾다가 언덕에서 굴러 떨어지고, 평화롭고 목가적인 옛날의 마을이었던 ‘인비올라타’는 현대의 인간이 만들어낸 끔찍한 착취의 현장이었음이 밝혀진다. 라짜로와 인비올라타 마을은 동시에 추락하고, 무너진다. 이 둘은 영영 죽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라짜로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혼란스러움을 뒤로하고 모두 마을 밖으로 흩어져버린다.


 

라짜로는 성스러움을 예감한 늑대의 후각과 함께 ‘부활’한다. 몇 년이 지나고 난 후, 아무렇지 않게 똑같은 모습으로 깨어난다. ‘부활’이라는 것은 별 수 없이 종교적인 느낌을 준다. 그리고 여기에서 바보 같고 순수하고 안타까웠던 라짜로의 모습은 점점 ‘신’이라는 성스러운 존재의 얼굴로 변모한다. 몹시 추운 겨울에 혼자 반팔을 입고 현대로 걸어 나오는 라짜로의 모습을 담은 기나긴 시퀀스를 지나면, 라짜로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눈앞에서도 성스러운 존재로서 ‘부활’ 해있다.


부활한(이제는 감히 신이라고 상상해도 좋을) 라짜로가 거쳐가는 현실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하다. 여전히 착취가 이뤄지고 있는 곳, 갈 곳도, 살 곳도, 할 일도 없어 도둑질을 하며 겨우 살아가야만 하는 대가족의 모습. 라짜로를 알아보며 기도를 올린 안토니아는 얇은 옷만 입은 채 덩그러니 눈 쌓인 도시에 남겨진 라짜로를 데려간다. 현대의 냉혹한 인간들에게 있어 라짜로는 그저 정신이 반쯤 미친 괴상한 사람이지만, 라짜로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라짜로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 그렇기에 라짜로는 과거 자신과 마을에 갇혀 살았던 이들에게 일종의 구원을 건네준다. 돈이 없어 과자를 먹어야 하고 굶어야 했던 이들에게 지천에 깔린 먹을거리를 알려준다. 그들은 비로소 라짜로 덕분에 허기를 해결한다.



라짜로를 둘러싼 모든 이미지들은 ‘순수함’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 순수함은 ‘근원적인 것들’로도 연결될 수 있다. 그는 그저 옷 한 벌을 입고 있고, 얼굴엔 어떠한 악의나 근심도 없으며, 사람을 관통하는 무기가 아닌 장난감처럼 보이는 새총을 가지고 있다. 그는 현대에서 사람들이 목숨을 거는 것들과는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의 눈에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 라짜로는 도심의 그 어디에도 온전히 존재할 수가 없다. 그는 돈을 벌 수도, 사람들과 현실적인 대화를 할 수도, 은행에 가서 업무를 볼 수도, 심지어는 교회에 들어갈 수도 없다. 하지만 카메라에 비춰진 그의 모습은 언제나 특별해 보인다. 평범하게 거리를 걷는 사람들 틈에 유독 밝게 빛나는 눈을 가진 존재, 하찮고 무용해 보이지만 맨바닥에서 먹을 것을 찾아주는 존재, 교회에서 쫓겨났지만 교회의 음악을 이끌어오는 존재. 이런 환상적인 연출은 라짜로를 더욱 신비하고 성스럽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도시의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라짜로는 신이 죽어버린 현대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신의 축복과 구원이 가득해야 할 교회에서마저도 라짜로는 쫓겨난다. 결국 성자는 어디에 있고, 신은 어디에 있는가? 구원과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세상의 겉 둘레를 빙빙 돌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에서는 신의 그림자조차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은 서로의 외피를 모방하며, 서로를 물어뜯고 의심하며, 본질 아닌 껍데기만을 공유한 채 자신들이 똑똑하다고 자만한다. 그들은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는 잔혹한 진짜 총에 굴복하며, 순수함만을 간직한 새총에는 기세등등하다. 라짜로의 빛나는 눈은 도시의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다.


 

비교적 원초적이었던 마을에서도 무시당했던 라짜로를 생각해 보면, 결국 변한 시대만이 신성함을 파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신의 신성함을 파괴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우매함, 인간의 이기심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이에게 결코 기도와 축복을 올리지 않고, 폭력과 멸시를 건넨다. 하지만 사람들이 인간 우월 의식으로 세워진 도심에 갇혀 살아가는 이 시대에는 늑대의 울음소리 마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에겐 더 이상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다. 그렇기에 라짜로의 존재는 더 이상 빛날 수 없다.


새총을 가졌기에 숨이 끊기도록 얻어맞는 신성한 존재. 그에게 더 이상 부활은 없다. 도로에 놓인 늑대는 이제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와 도로의 소음에 비틀거리며 도망치듯 걸어가는 늑대의 모습은 한없이 애처로워 보인다.


신성함이라는 능력이, 인간 세상에서는 그저 폭력으로 전락해 버린 채
그 위대함을 상실해 버린 것 같아서 슬퍼진다.


인간의 자만 가득한 본성으로 치장된 세상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라짜로의 마지막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전지전능하게 세상을 정리해 줄 거라고 믿었던 신성한 존재는 어디에 있는 걸까. 결국, 악의 인간을 파멸시킬 수 있을 거라고 신의 능력을 예측했던 그 믿음조차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을 해본다. 진정한 신의 힘, 신성함, 전지전능한 무언가는 결국 절대적인 ‘선’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라짜로는 세상을 정리하기보다는 늘 선의 힘으로 누군가를 돕거나 축복을 베풀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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