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더풀 라이프>
우리는 늘 항상 같은 질문을 되뇐다.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살았던 삶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그저 죽음만 남는 걸까?
위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삶의 의미와 죽음의 의미에 대해 필연적으로 고민해 보게 된다.
삶과 죽음의 중간, 그곳엔 '림보'가 존재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곳에서 사람들이 '가장 행복했던 기억'만을 간직한 채 따뜻한 천국으로 떠나길 바란다. 추억을 선택하지 못한 자들은 계속 림보에 남아 다른 이들의 기억을 재현해 내는 일을 한다. 그곳엔 나이도 없고, 순서도 없고, 돌아오지 못할 죽음이나 한정적인 삶도 없다. 그저 하나의 인간과 그가 가진 인생이 존재할 뿐이다.
이 영화에서는 요일로 표시되는 일주일의 시간 동안 림보에 머무르는 사람들의 행복한 추억을 함께 골라내고, 그것을 함께 재현해 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누군가는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고르고, 누군가는 내내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고르지 못해 림보에 남는다. 누군가의 기억은 거대하고 장렬하지만, 누군가의 기억은 딱히 추억할 만한 일인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사사롭고 평범하다. 림보에 들어온 모두의 삶은 다른 자취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행복했던 순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영화를 보는 우리 자신의 삶을 바라본다. 그렇기에 이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를 만드는 것과 그것을 누군가가 보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림보에서 사람들의 선택을 도와주는 일을 하는 인물들은
마치 '영화 제작 스태프' 들처럼 보인다.
그들은 함께 이야기를 나눠 추억에 관한 정보들을 모아, 로케이션을 섭외하고, 그 기억을 촬영하기 위해 스태프들처럼 준비하고 작업한다. 기억의 재현이 시작되면, 모두 뒤로 물러나와 카메라와 현장을 함께 바라보며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는지 숨죽여 바라본다. 그들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찍는 것만 같다.
그들이 기억의 재현에 들어가기 직전, 준비하는 과정 역시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대상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사유를 통해, 가장 사실에 가까운 모습을 체험할 수 있도록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그가 정말로 옛 추억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기 위하여 가장 알맞은 로케이션과 소품, 의상들을 고른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만 기억의 재현이 시작된다.
이 영화를 통해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왜 영화를 찍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종종 '영화는 마치 삶 같고, 동시에 삶은 마치 영화 같다'라는 말을 한다. 원더풀 라이프에서는 삶과 죽음을 영화를 찍는 것과 동일시하여 우리의 삶과 함께 영화를 찍고 보는 행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영화에서 하나의 삶은 마치 하나의 영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그것을 '재현하여 찍는' 행위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 의미를 찾아야만 천국으로 올라가 안식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은 인간이 영화를 만들어내는 과정과 일치한다.
당신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영화 속의 인물들은 모두 똑같은 질문을 받는다. 모두 당황한 듯하다가도, 이내 우물쭈물 자신의 사사로운 얘기부터 털어놓으며 입을 연다. 그들은 며칠 동안이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인생과 기억에 대해 반추해 본다. 가장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림보에서 일하는 인물들은 그 이야기들을 들어주며 림보에 도착한 이들이 하나의 추억을 선택할 수 있도록 성의를 다 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일하며 수많은 인생과 만나고,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하나의 사건에 깊이 다가가고 그 사건과 호흡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에 의하면, 하나의 영화를 만드는 것은 나의 인생을 반추하고 타인의 인생을 반추해 보는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고르라는 최후의 질문은, 결국 살아가면서 나 자신이 어땠는가에 대한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질문이다. 그 순간이 어떤 순간이 든 간에, 결정이 내려진 순간부터는 오로지 나와 그 기억에만 집중하며 빠져들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들 때, 그 안에 속해있는 무수한 세상과 기억 역시 누군가의 시선과 생각에 의해 선택된 것들이다. '지금 내가 가장 써야 할 이야기가 무엇인가?', '어떠한 질문이 내게 가장 간절한가?'라는 질문과 창작자의 선택이 끝난 이후에는 모두가 그 선택된 것들에 몰두하고 집중하며 그것들을 '재현'해내기 위해 작업한다. 마치 죽은 사람이 자신의 최후의 기억만을 가지고 떠나는 것처럼, 영화란 세상을 향한 단 하나의 소중한 기억에 집중해 그것을 간직하게 만드는 일이다.
영화로 만들어진 기억과 세상은 시간이 오래 지나고 모든 것이 변해도 영원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남아있다. 그 기억에 남고 싶은 누군가가 언제 어디서든 꺼내볼 수 있게끔. 누군가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처럼, 한 편의 영화는 그만큼 중요한 것들을 기록해 내며 많은 관객들에게 중요한 것을 보여줘야 함을 상기시킨다.
영화 속에서는 많은 이들의 인생이 재현되고 지속되다가 끝내 마무리된다. 하지만 영화가 지속될수록 림보에 남아서 일을 하는 이들에 관한 의문이 남는다. 그 의문은 림보에 도착한 와타나베의 추억을 고르게끔 도와주는 타카시가 와타나베의 기억과 얽혀있음을 알게 되면서 서서히 커져간다. 영화가 시작될 때에 우리는 이들이 왜 여기에서 일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 우리는 그들이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선택하지 못한 자'들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모두가 각자의 기억을 선택하고 천국으로 떠나는 동안 그들은 자신의 기억을 선택하지 못해 계속 그곳에 남아있다. 와타나베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타카시를 통해, 림보에서 일하는 이들은 관객들과 연결된다.
동시에 림보에서의 기억을 버릴 수 없다는 시오리의 고민과 질문 또한 인상적이다. 림보는 일종의 가상현실이다. 림보에서의 기억들은 잊어야만 하는 것인지, 남겨둬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해볼 수 있다. 여태 관객들은 인물들이 부여받은 질문에 스스로 참여했을 뿐, 영화에게 직접적으로 끌려가진 않았다. 그러나 타카시의 기억 찾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관객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영화에 관계되기 시작한다.
타카시는 수많은 사람들을 천국에 보내며 수많은 인생을 관찰한 관찰자다. 그는 그러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고, 진정 자신이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찾게 되며 자신이 잊고 있었던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통찰해 본다. 이때, 타카시는 원더풀 라이프를 보는 관객과 동일시되며, 동시에 영화라는 매체를 스크린에서 마주하는 일반적인 관객들과도 동일시된다.
어떤 중대한 기록을 마주하여 그 안에서 삶과 만나는 일. 타카시는 관객으로서, 또 이 영화와 다른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은 관객으로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말하는 그 행위를 경험하게 된다. 기존에는 느끼지 못했을 '관객으로서의 경험'일지 몰라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냐'는 물음과 누군가의 인생에 얽힌 인물이 자신과 맞닿아있는 순간, 관객들은 좀 더 철학적이고 진지하게 영화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저 관람에 그치지 않고 삶에 영화를 끌어들여오는 것이다. 마지막 타카시의 기억을 재현할 때,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카메라와 사람들의 눈빛은 관객들의 인생에 몇 걸음이나 더 가까워져 있다. 마치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누군가'의 인생을 촬영하고 있는 듯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왜 영화를 찍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이 영화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를 만들거나 보는 것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은 영화인들에겐 물론이고 관객들에게도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다. 천국으로 가기 직전 천국에서의 평안함을 위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기록하는 것처럼, 영화 또한 가장 의미 있고 남겨둬야 마땅한 일들을 담아내야 할 기록의 행위다. 오랜 시간 동안 고민의 주제가 되어왔던 카메라의 시선에 관하여, 또 하나의 문장이 남겨진다.
카메라는 삶에 관하여,
세상에 관하여 잊지 못할 일과
잊어선 안 될 소중한 것들을 담아낸다.